연곡사 전경 |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고 했다. 지리산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피아골도 그 중 하나다. 탑사와 은수사, 금당사를 품고 있는 전북 진안 마이산에서 출발한 강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의 경계지역에 다다른다. 봄이면 벚꽃이 끊임없이 이어져 전국에 그 이름을 알리고 있는 섬진강 벚꽃길 중간쯤에 피아골 계곡과 섬진강이 만나는 외곡 삼거리가 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화개장터와 쌍계사 벚꽃 계곡길도 만날 수 있다.
전남 구례군 연곡사 앞으로 흐르는 피아골 계곡 |
구례 토지면 외곡 삼거리에서 반야봉 오르는 등산로 초입 직전마을까지 이어진 깊고 넓은 계곡길 10㎞엔 여름이면 수많은 피서객이 찾아오고, 가을이면 단풍 때문에 인산인해를 이른다. 노고단과 반야봉의 중간쯤에 위치한 피아골 삼거리에서 섬진강과 인접한 외곡 삼거리까지 20여㎞에 이르는 계곡 길은 대한민국 최고의 단풍 길이기도 하다.
직전마을 표지판 |
피아골 도로길이 끝나고 등산길로 접어드는 초입의 조그만 ‘직전마을’ 표지판엔 이러한 내용이 있다.
“연곡사에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행하던 시절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오곡 중 하나인 피(기장)를 많이 심어 ‘피밭골’이라 불리던 곳이 점차 변화되어 ‘피아골’로 불리게 되었고 이곳 마을을 피 직(稷), 밭 전(田)을 써서 직전(稷田)이라고 부르고 있다.”
폭염을 피해 피아골 계곡에 발이라도 담글 겸 연곡사를 찾았다. 피아골 지명을 탄생시키고 지리산의 아픔을 간직한 천년 고찰이다. 연곡사 앞에 도착하니, (지금은 대부분 전통 사찰의 문화재 관람료가 폐지됐지만) 10여 년 전에 연곡사 앞 도로에서 등산객들에게도 입장료를 받고 있었던 후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찌어찌 사는지…”
피아골 순국위령비 |
백두대간의 종착지 지리산(1915m)은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이며 남한 본토에선 가장 높고 넓어서 경상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등 3개도 5개 시·군에 걸쳐있는 민족의 영산이다. 3개도를 상징하는 지리산 3대봉인 구례 쪽의 노고단(1507m), 남원의 반야봉(1732m), 산청과 함양에 걸쳐있는 천왕봉이 이어져 길게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20개의 능선 사이로 골 깊은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피아골, 뱀사골을 비롯해 중산리계곡, 칠선계곡, 한신계곡, 백무동계곡 등 수십 개의 크고 긴 계곡들이 여름 피서객을 반긴다.
그 중에서 반야봉 중턱에서 발원해 임걸령 등 밀림 지대를 거치며 피아골 삼거리에서 내서천을 타고 연곡사를 지나 섬진강으로 빠져나가는 피아골은 계곡미가 특히 뛰어나다. 똑같이 반야봉에서 발원해 피아골 삼거리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 남원 방향으로 흐르는 뱀사골과 함께 지리산 양대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20㎞에 이르는 피아골 단풍은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답다. 산도 붉고(山紅), 물도 붉게(水紅) 비치며, 그 안에 있는 사람도 붉게 물든다(人紅)고 해 피아골 계곡 단풍을 삼홍(三紅)이라 부르며, 지리산 자락의 백미로 꼽는다.
연곡사 대적광전 |
조선 중기 대표적 유학자인 남명 조식은 직전삼홍소(稷田三紅沼)라는 시를 지어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 하지 마라”고 했다. 해마다 10월 말이면 전국에서 모이는 등산객들이 피아골 단풍제 및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연곡사를 지나 직전마을부터는 계곡 따라 오르는 산행길이며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 반야봉까지 가려면 4시간은 족히 걸린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한말 격동기, 여수·순천사건, 6·25 전쟁 등 전쟁과 사건이 있을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빨치산을 소재로 한 반공영화 ‘피아골’이 1955년 개봉되기도 했다. 우리 민족 수난사의 지워지지 않은 아픔을 간직한 계곡이다.
때 마다 워낙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인지라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 계곡물이 피로 붉게 물들어 피냇골(혈곡천)이라고 부르던 것이 피아골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연곡사 삼층석탑 |
지리산 천왕봉 바로 아래 바위에 1924년에 새긴 “오랑캐(일본)를 물리쳐 밝고 빛나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비분강개한 어조로 토로한 392자의 바위 글씨가 얼마 전 공개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동학 교도들,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 동존상잔의 비극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피난처였고 희망의 땅이기도 했다. 불교에서는 지리산을 지혜의 산이라고 해 문수보살이 있는 도장이라고 하며, 지리산 중심에는 ‘불교를 꿰뚫는 지혜’를 뜻하는 반야(般若)봉이 있다.
연곡사 전경 |
지리산은 오래 전부터 큰 산, 신령스러운 산으로 유명을 떨치고 있어 오래된 고찰도 많고 역사적 아픔도 많다. 교구본사인 구례 화엄사, 하동의 쌍계사 등 큰 사찰을 비롯해 실상사, 칠불사, 벽송사, 대원사, 내원사, 법계사, 천은사 등 유서 깊은 고찰과 많은 암자를 품고 있다. 우리 민족 수난사의 아픔을 가장 많이 간직한 피아골 계곡에 똑같은 아픔을 함께했던 ‘연곡사’도 있다.
544년(백제 성왕22) 인도 승려 연기조사가 창건해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선(禪)도량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연곡사(谷寺)란 이름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큰 연못에 물이 소용돌이치며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법당을 세운 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연곡사 일주문 |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을 막기 위해 지리산 지역에서 승병들이 나서 왜군과 싸웠다가 연곡사를 비롯, 화엄사, 쌍계사, 실상사 등이 그 보복으로 사찰이 불타는 화를 입었다. 연곡사는 이후 복원됐으나 1907년 의병장 고광순이 연곡사에 훈련소를 차리고 왜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다시 불타버렸다. 그 뒤 곧 중건했으나 6·25전쟁 때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것을 우려한 국군에 의해 또다시 전소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오랫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1981년 정부와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 구법당을 없애고 대적광전을 신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경내에는 대적광전 뒤편에 있는 동 승탑(국보)를 비롯해 북 승탑(국보)·소요대사탑(보물)·동 승탑비(보물), 3층 석탑(보물)과 현각선사탑비(보물) 등 석조물들만 문화재로 남아있다.
삼홍루 |
외곡삼거리에서 계곡 따라 8㎞ 정도 올라가면 절에서 운영하는 카페 연우당과 가공하지 않은 기둥의 일주문에 ‘지리산 연곡사’라는 현판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좌측에 “이곳 피아골은 민족의 수난과 시련의 시기에 인고의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곳이다”로 시작하는 ‘피아골 순국위령비’가 발길을 붙잡는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승병, 한말의병 무장투쟁, 6·25 전쟁의 희생 등이 절절히 새겨져 있었다.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짐작되는 보물 3층 석탑은 대적광전 앞이 아닌 위령탑 뒤편에서 선열들을 위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천왕문과 보제루를 지나니 대웅전 앞마당의 백일홍이 유달리 붉게 보인다. 보제루 후면 현판은 ‘삼홍루’ 인데 이는 남명 조식이 피아골 단풍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 마음도 붉다”에서 옮겨왔다. 템플스테이 참석자로 보이는 한 여성이 홀로 대적광전에서 절하고 있는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이는 것은 내 마음 탓이리라.
동승탑 |
연곡사의 국보를 보기 위해서는 대적광전 뒤편 나지막한 언덕 위를 올라야 한다. 통일신라 시대 사리탑 가운데 장식과 조각이 정교하고 아름답다고 해 국보로 지정된 ‘동 승탑’과 그 앞쪽에 짝을 이뤄 세워진 ‘동 승탑비’(보물)가 있다. 승탑비는 비석의 몸돌은 누군가 훔쳐간 듯 받침돌과 머릿돌만 있는데 머릿돌에는 5마리의 용이 생동감 있게 조각돼 있고 받침돌은 용머리에 몸은 거북이 모양의 상상 속 동물이다.
동승탑비 |
신라 말기 풍수설의 대가 도선국사(827~898년)의 사리가 안치됐다고 전해지고 있는 ‘동 승탑’은 섬세한 조각 장식들이 완벽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반출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동 승탑 뒤쪽 산길 계단을 따라 150여m 올라가면 연곡사 가장 높은 곳에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북 승탑’(국보)이 외로이 있다.
북승탑 |
규모와 형태, 장식과 조각들이 동 승탑과 거의 동일한 모습이며 사찰 마당 쪽에 현각선사탑비가 있어 현각선사 승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전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승려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979년에 건립된 ‘현각선사탑비’는 관음전 옆에 있는데 여기도 몸돌은 사라지고 웅장한 돌 거북 받침돌과 여러 용이 얽힌 모습이 새겨진 머릿돌만이 남아 있다.
소요대사 승탑 |
‘북 승탑’에서 반대편 길로 내려오다 보면 조선 인조 5년(1627년)에 연곡사를 중창한 소요대사(1562~1649년) 사리탑(보물)과 이름 모를 부도 탑 3기가 보존돼 있다. 조선시대 효종원년(1650년)에 세웠다고 하는데 소요대사 승탑은 장성 백양사를 비롯해 몇 곳에 더 있다.
소요대사 승탑과 부도탑 |
연곡사는 조선 후기(1745년)엔 왕실의 밤나무(위패 제작용)조달 책임을 맡기도 해 주지가 율목봉산(栗木封山, 나라에서 밤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했던 산) 도제조로 임명돼 지리산 산림보호 역할을 했다. 도선국사 등 이름난 많은 고승을 배출한 연곡사지만 조선의 척불정책으로 힘을 잃었고 임진왜란이후 소요대사가 중창하고 총림을 개설해 400여명의 스님들과 함께 선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승려들의 식량 확보를 위해 피(기장)를 많이 심어 ‘피아골’이 된 듯하다.
대적광전과 관음전 |
남해에서 섬진강을 통해 배를 타고 들어온 왜구들이 피아골을 넘어 남원, 전주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목이기에 피아골은 예전부터 왜구의 침략을 막는 요새였다. 임진왜란 때는 연곡사에서 700여 승병을 일으켜 섬진강변 천연요새 석주관(石柱關)에 나가 맞서 싸우다 장열하게 전사했다. 정유재란 때는 피아골 연곡사에 승병들의 훈련장이 세워졌고 연곡사는 153명의 승병을 일으켜 일반 의병 3500명과 합세해 왜군과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들과 함께 순국했다.
현각선사 탑비 |
섬진강변 석주관에 있는 연곡사 승병들의 순국을 추념하는 비(碑)에는 “~ 중이라고 어찌 가리랴. 기꺼이 나라 위해 일어섰도다. 핏물이 내를 이룸을 한 조각의 돌에 사연을 새기니 그 절개 그 충성 영원하리라”라고 적혀있다. 연곡사는 정유재란 과정에 사찰이 잿더미가 됐다.
연곡사 관음전 옆쪽의 ‘현각선사비명’ 바로 지척에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고광순(1848~1907년) 의사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호남의병대장이 돼 남원, 광주, 화순, 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며 연곡사에서 치열한 유격전을 펼치다 일본군경에 포위돼 집중포화를 받고 1907년 10월 17일 순국했다. 일본군은 연곡사도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다.
고광순 의병장 순국지 |
담양 출신 고광순 의병장은 임진왜란 의병장 충렬공 고경명 선생의 12대 손이기도 하며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에 모두 참여한 호남의병의 상징적 인물이다.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을 새기고 이를 군기(軍旗)로 사용했으며 지리산 포수들까지 규합해 의병으로 전환시켰다. 화력이 강한 일본군에 대항해 장기 항전체제로 전환할 계책을 수립해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은 연곡사를 중간 기지로 삼아 군사들을 훈련시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했다.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 |
승탑이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이다. 건물들은 모두 불타고 승탑, 석탑 등 석조물들만 남아 연곡사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승탑들이 운명적인 질곡의 역사를 체험해 온 것처럼 살아 있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피(기장)를 많이 심어 ‘피밭골’로 이름짓게 만든 수많은 승려들도, 피밭(稷田)도 이제는 피아골에 보이지 않는다. 계곡물을 피로 붉게 물들어 피냇골(혈곡천)이라 했던 질곡의 역사만이 내서천 타고 섬진강으로 흘러가며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듯하다.
피아골에서, 연곡사에서 평화와 통일을 염원해 본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