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한 빈티지 의류 전문 매장의 모습 |
경기침체와 물가 부담에 앞서 구매한 제품을 다시 판매하는 리커머스(recommerce) 시장이 조용하게 커지고 있다. 대표 주자는 패션이다. 소비심리 회복이 더딘 가운데 조금이라도 돈을 적게 쓸 수 있는 중고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어서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중고 플랫폼인 번개장터의 패션 거래 건수는 올해 1~7월 기준, 전년 동기 대비 53% 증가했다. 올해 1분기 패션 카테고리 유료 결제액은 약 640억원이었다. 전년 동기 대비 100%, 지난해 4분기 대비 43% 성장한 규모다. 번개장터 관계자는 “패션 비수기인 여름에 의류 중고 거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전과 다른 현상”이라고 말했다.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의류·신발 소비자물가지수는 누적 평균 113.9이었다. 고물가가 이어지면서 소비자 부담이 눈덩이로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당근마켓과 번개장터 등 주요 플랫폼 외에도 의류·전자기기 등 전문 영역을 가진 플랫폼도 새롭게 문을 열고 있다. 지난해 8월,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중고의류 플랫폼 ‘차란’이 대표적이다. 스타트업 성장 분석 플랫폼 혁신의 숲에 따르면 해당 플랫폼의 소비자 거래 건수는 올해 1월 2385건에서 6월 5907건으로 급증했다. 스마트기기 리커머스 플랫폼 ‘21세기 전파상’, 간편 의류 수거 및 리세일 플랫폼 ‘리클’, 중고 가전·가구 거래 플랫폼 ‘딜 아트(deal art)’ 등 플랫폼 간 경쟁은 갈수록 더 치열해지고 있다.
이런 변화는 리커머스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안정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중고 거래 플랫폼의 서비스 고도화는 살 사람과 팔 사람이 많아야 가능한 것”이라며 “새 상품보다 소비의 효율성, 자원 절약을 중시하는 인식의 변화가 부른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국내 중고 거래 시장은 2020년 20조원 규모에서 지난해 약 30조원 수준으로, 3년 만에 50% 가까이 증가했다. 확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최근 번개장터가 발표한 ‘럭셔리 리세일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중고 거래 시장은 2025년 약 43조원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기준 온라인 쇼핑을 통한 먹거리 시장보다 큰 규모다.
밀레니얼 세대와 잘파 세대를 중심으로 복고 패션, 가치 소비 성향이 짙어지면서 중고 의류 및 상품의 가치는 올라가고 있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만족감을 높일 수 있고, 친환경 움직임을 실천할 수 있어서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보여주기식 문화와 더불어 젊은 세대의 소비력이 떨어지고 있는 점도 배경으로 꼽힌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리커머스 시장은 디지털 친화적인 젊은 소비자가 견인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흐름”이라며 “실질 소비력이 하락할수록 ‘중고’라는 선택지를 택할 가능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이 전 세계 약 4만명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2023 보이스 오브 인더스트리: 지속가능성 조사’에 따르면 MZ세대 기준 40% 이상의 응답자가 주기적으로 몇 달에 한 번씩은 중고 물품을 구매한다고 답했다. 해당 조사에서 한국인 소비자는 응답자 중 22%가 최소 몇 달에 한 번씩은 중고 제품을 구매하고, 23%가 중고 제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1년간 중고 지출을 늘리겠다고 답한 사람도 19.5%로 5명 중에 1명 꼴이었다.
주요 기업도 중고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차원에서 환경 순환을 실천하고, 신사업으로서 수익을 거두는 등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어서다.
현대리바트는 지난해 3월부터 개인 간 중고 가구 거래 플랫폼인 오구가구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달 말 기준 페이지뷰(상품게시글 확인자 수)는 월평균 약 30만회로 오픈 첫 달 대비 5배 이상 증가했다. 현대리바트 관계자는 “가구를 전문가가 이동해주는 ‘오구가구 이동서비스’는 월평균 350건가량 접수돼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네이버는 ‘미사용 중고 상품’ 거래 플랫폼인 크림에 이어 2022년 미국판 당근마켓인 ‘포시마크’를 2조3000억원에 인수해 현재 사업을 키우고 있다.
김희량·전새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