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발레단 창단 공연 ‘한여름 밤의 꿈’ 주역을 맡은 무용수 시후아이(왼쪽부터)와 시즌 무용수 김소혜, 남윤승. 임세준 기자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모두의 ‘초심(初心)’이 모였다. ‘좋은 길’로 향하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만나 서로를 알아갔다.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각자의 색을 드러내면서도 서로의 색에 나를 입힌다.
“지금 여기엔 숨을 곳이 없어요. 말보다는 몸을 통해 자신을 보여줘야 하고, 나의 움직임을 알아야 하죠. 그 과정에서 내가 어느 정도의 기량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어떤 춤을 추고 있는지 마주하게 돼요.” (리앙 시후아이)
유니버설 발레단 솔리스트 출신의 리앙 시후아이(38), 뉴욕 페리댄스 컨템포러리 무용단 출신의 김소혜(34), 박진영·싸이가 함께 연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라우드(LOUD)’ 출신의 남윤승(22)…. 세 사람은 국내 최초의 공공 컨템포러리 발레단인 서울시발레단의 창단 공연을 이끌 ‘간판 무용수’다. 이들은 개막을 앞둔 ‘한여름 밤의 꿈’(8월 23~25일, 세종문화회관)을 통해 관객과 만날 준비에 한창이다.
최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세 무용수는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을 하고 있다”며 “몸은 힘들지만 함께 하는 무용수 32명이 다 같이 성장하는 기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서울시발레단 시즌 무용수 김소혜(왼쪽부터), 남윤승과 창단 공연 ‘한여름밤의 꿈’ 주역을 맡은 시후아이. 임세준 기자 |
“나의 이야기, 나의 춤을 추고 싶었어요.”
세 사람의 전공은 사실 ‘클래식 발레’였다. ‘고전의 세계’에서 자신을 연마하던 이들은 시기는 달랐지만, 어느 순간 새로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국에서 17년째 활동 중인 대만 출신의 시후아이는 지난해 6월 유니버설 발레단을 퇴단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프리랜서 무용수가 됐다”고 말했다.
서울시발레단의 운영 방식은 파격적이다. ‘정년 보장’의 단원제, ‘피라미드형 계급제’를 벗어나 시즌 단위로 계약하는 무용수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작품의 규모와 특성에 따라 객원 무용수, 프로젝트 무용수를 선발한다. 나이, 연차에 상관없이 실력이 뛰어나면 누구나 주요 배역을 맡을 수 있다.
오디션은 발레단의 창단을 앞둔 지난 1월 진행됐다. 수 차례의 오디션을 통해 2024 시즌 무용수로 김소혜·김희현·남윤승·박효선·원진호 등 5명을 선발했다. 창단 공연의 주역 무용수로는 리앙 시후아이, 슬로바키아국립발레단 종신 솔리스트 이승용 등을 뽑았다. 서울시발레단은 업계의 ‘후발주자’이나, ‘차별점’으로 무장한다. 김소혜는 “저마다 새로운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는 곳”이라고 했다.
남윤승은 K-팝 팬들 사이에선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울산예고 재학 중이던 지난 2021년 SBS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라우드’에 출연해 박진영의 선택을 받았다. 당시 남윤승이 선보인 방탄소년단(BTS)의 ‘블랙스완’은 아이돌 가수로의 가능성도 보여줬다.
서울시발레단의 창단 공연 ‘한여름밤의 꿈’을 연습 중인 남윤승 [서울시발레단 제공] |
그는 “고전 발레를 하면 대중적인 무대에 서기 쉽지 않다 보니 언제 또 대중적인 무대에 올라볼까 싶어 ‘라우드’에 나가게 됐다”며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지만, 프로그램을 하면서 오히려 발레에 더 충실하면서 나의 춤을 발전시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서울시발레단의 오디션에 지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보다 다양한 춤을 추고 싶었다”는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떨어질 각오로 도전 삼아 지원, 발레단 시즌 무용수 중 막내로 매일 자신의 벽을 넘고 있다.
그는 “발레단에 출근하며 하루하루 성장을 체감하고 있다”며 “몸과 움직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통해 매일 욕심이 커진다. 어떤 움직임이든 한계 없는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서울시발레단 관계자도 그에 대해 “굉장히 성실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고 말할 정도다.
시후아이의 춤엔 여러 문화가 어우러진 보편성이 담긴다. 국립 타이페이 예술대학과 미국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를 나와 미국, 뉴질랜드, 한국에서 활동한 경험들이 춤의 총체가 됐다. 그는 “나라마다 문화가 다른 것처럼 발레도 나라와 예술감독에 따라 굉장히 다르다”며 “다양한 나라,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경험과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돌아본다.
시후아이는 ‘천생 무용수’다. “춤을 추지 않았다면 뭘 하고 살았을지 모르겠다”는 그는 “무용수로서 더 오래 춤을 추고 싶고, 주어진 배역을 넘어 나의 이야기를 더 많이 꺼내고 싶어 컨템포러리 발레에 마음을 두게 됐다”고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클래식 발레를 전공한 김소혜 역시 “클래식 발레의 정해진 룰을 정석처럼 따르는 방식이 내겐 적합하지 않았다”며 “특히나 어느 순간 클래식 발레가 늘지 않는다는 생각에 또 다른 발전을 이루고 싶어 컨템포러리 발레와 모던 댄스를 배우게 됐다”고 했다. 2017년부터 뉴욕 페리댄스에 5년 간 몸담은 그는 “다양한 인종들이 컨템포러리 발레 안에서 서로의 춤과 삶을 존중해주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웠다”며 가만히 웃었다.
사실 김소혜는 이번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 마음 고생이 적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허리 부상 때문이다. 그는 “부상으로 아쉽게 공연에 빠지게 됐다가 운동과 치료를 병행하며 상태가 많이 호전돼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출연할 수 있게 됐다”며 활짝 웃었다. ‘거대한 아우라’로 무대를 장악하기 보단 “무대 위 한 공간을 지키는 ‘편안한 무용수’”를 꿈꾸는 그는 고요하지만 강인한 존재감으로 관객과 만날 생각이다.
[서울시발레단 제공] |
지난 5월, 30여 명의 무용수와 안무가는 처음 만났다. 창단 공연 ‘한여름 밤의 꿈’ 연습 기간에서 첫 3주는 일종의 ‘워크숍’ 기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기간이었어요. 안무가와 무용수, 무용수와 무용수가 서로의 움직임과 성향을 파악하는 시간이었죠.” (시후아이)
이 작품을 진두지휘할 안무가는 미국에서 30년 가까이 활동 중인 ‘스타 안무가’ 주재만. 미국에서 그의 별칭은 ‘J(제이)’다. 1996년 프랑스 바뇰레 국제무용축제에서 최고 무용수상을 받았고, 2009년 미국 그레이스 재단에서 안무가 상을 받았다. 현재 컴플렉션즈 전임 안무가이자 피츠버그의 포인트파크 대학 무용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 사람은 “주재만 선생님은 안무를 직접 보여주면서 꼼꼼하고 날카롭게 연습 과정을 이어가는 스타일”이라며 “무용수의 그날 컨디션, 체력, 정신력 상태까지 말하지 않아도 간파하고 있다”고 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무대로 올린 이 작품에선 요정 퍽이 주인공이다. 뉴질랜드에서 故 리암 스칼렛이 안무를 맡은 ‘한여름 밤의 꿈’에도 출연했던 시후아이가 이번 작품에서도 퍽을 만났다. 그는 “이전 작품에선 원작에 가까운 스토리텔링으로, 퍽이 귀여운 트러블 메이커이자 사랑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존재했다면 이번 작품에서의 퍽은 500~600년이 흘러 어린시절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신의 영역’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존재로 사랑을 이어주는 메신저”라고 했다.
무대도 화려하다. 7m 높이의 대형 세트,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무대미술, 150여 벌에 달하는 의상이 컨템포러리 발레의 진수를 보여준다. 슈만의 음악과 미국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필립 대니얼의 라이브 피아노곡이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움직임 위에 입혀진다.
세 사람은 이 작품이 한국 관객에겐 다소 낯선 ‘컨템포러리 발레’의 매력을 보여줄 거라 확신한다. 시후아이는 “한국은 클래식 발레 팬덤이 워낙 탄탄해 컨템포러리 발레는 낯설 수 있다”며 “종종 컨템포러리 발레가 뭐냐고 묻는 관객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클래식 발레가 일정 수준에 올라온 현재,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컨템포러리 발레’ 시대가 열릴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시발레단 무용수 시후아이(왼쪽부터), 김소혜, 남윤승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세 무용수가 이야기하는 클래식 발레와 컨템포러리 발레의 가장 큰 차이는 ‘규칙과 변칙’이다. ‘옛날옛날에’로 시작해 ‘왕자와 공주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맺는 고전동화의 서사 구조를 갖춘 클래식 발레는 규칙적이다. ‘불변의 진리’처럼 정해진 틀 안에서 주어진 역할과 춤을 춰야 하기에,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 컨템포러리 발레는 무용수들에게 보다 많은 자유와 개성을 허락한다. “발레 테크닉을 기본으로 하지만, 규칙을 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김소혜의 설명이다. 사용하는 몸과 움직임도 다르다. 시후아이는 “클래식 발레는 똑바로 서서 밸런스를 잡아야 하나, 컨템포러리 발레는 오프 밸런스를 많이 사용한다. 중심을 잡기 보단 중심을 깨고 넘어진다”며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움직임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춤”이라고 말했다.
컨템포러리 발레 안에서 무용수들을 끊임없이 자신을 꺼내는 과정을 마주한다. 남윤승은 “클래식 발레는 정해진 답을 지키며 추는 춤이라면 컨템포러리 발레는 정답이 없다”며 “보다 새롭고 특별한 움직임과 이야기, 메시지를 현대적으로 담아낸 발레”라고 봤다. 시후아이도 “특정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기 보단 무용수 자체가 역할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게 (무용수가 느끼는) 컨템포러리 발레의 매력”이라고 했다.
관객들에게도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과 다양한 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루할 틈이 없는 무대”라는 것이 세 사람의 생각이다. 시후아이는 “무용수들이 롤플레이(Roll Play)를 하는 것을 넘어 개개인의 개성과 삶의 경험, 인생의 과정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남윤승도 “무용수마다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 관객들이 이입할 수 있는 장면들이 더 많다. 컨템포러리 발레 입덕에 딱 좋은 작품이 ‘한여름밤의 꿈’이 될 것”이라며 기대를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