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용재 오닐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리처드 오닐(Richard O’Neill)’이라는 전형적인 아일랜드나 영국계 이름 외에도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하다며, ‘용기와 재능’이라는 뜻의 용재를 미들네임으로 지어주셨어요.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세계적인 비올리스트이자 한국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이끈 첫 스타 연주자인 리처드 용재 오닐(46)의 ‘중간 이름’은 이렇게 태어났다. ‘용재’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바이올리니스트 강효 부부.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는 얍 판 츠베덴 감독의 스승이기도 하다.
용재 오닐은 최근 헤럴드경제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한국 친구들은 제 이름이 ‘소박한 시골 소년의 이름’ 같다고 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지금의 스타성을 갖기 이전, 용재 오닐을 성장으로 이끈 첫 단체는 세종솔로이스츠였다. 강효 줄리어드 음대 교수가 8개국 출신 11명의 제자와 함께 1994년 뉴욕에서 만든 현악 오케스트라다. 용재 오닐은 줄리어드에서 막 석사 과정을 시작할 때 세종솔로이스츠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6년 간 비올라 수석으로 활동했다.
“한국에 대한 막연했던 생각이 달라지게 된 건 세종솔로이스츠 활동을 통해서였어요. 세종에 한국어를 하던 한국 출신 멤버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 부지런히 한국어를 배웠어요. 저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세종이 있었고, 세종이 지대한 역할을 했어요.”
용재 오닐은 오는 27일 세종솔로이스츠가 올해로 7년째 열리는 여름 음악축제인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이하 힉엣눙크)을 통해 한국 관객과 만난다. 세종솔로이스츠 설립 30주년을 맞는 올해엔 그간 악단을 거친 쟁쟁한 음악가들이 총출동한다. 용재 오닐은 그 중 단연 최고의 스타다.
리처드 용재 오닐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
‘힉엣눙크’를 이끄는 강경원 예술감독은 용재 오닐과의 첫 만남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강 감독은 “줄리어드 맞은편에 자리한 사무실에 용재가 비올라만 들고 찾아왔다”며 “첫 모습이 너무나 단정하고 성실했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용재 오닐은 술도 안 마시고 마라토너처럼 오로지 비올라 연습만 하는 ‘성인 같은 사람’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사실 비올라는 무색무취의 악기다. 오케스트라 안에선 ‘존재감’이 없애므로써 존재감을 증명한다. 고음의 바이올린과 저음의 첼로 사이에서 악기와 악기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해서다. 용재 오닐은 “비올라 연주자는 남을 돋보이게 도와주고 스스로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비올라 연주자 중엔 스타 솔리스트도 드물다. 강 감독은 “비올라는 독주 악기가 아니라 잘한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용재는 연주를 너무나 잘했다”며 “처음 연주를 듣자마자 당장 세종솔로이스츠와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용재 오닐의 비올라가 특별한 것은 악기 안에 그만의 음색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가라면 악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생각한다”며 “비올라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사람의 목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올라를 선택했고, 악기의 소리를 통해 나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리처드 용재 오닐 [세종솔로이스츠 제공] |
세종솔로이스츠와의 만남을 계기로 용재 오닐은 한국에서 보다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2007년 실내악 그룹 ‘앙상블 디토’를 결성한 것도 세종솔로이스츠의 활동이 바탕이 됐다. 앙상블 디토는 해체된 2019년까지 용재 오닐과 함께 한국의 클래식 팬덤 문화를 일궜다.
그는 “커리어 초기의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아낌없는 지원하는 세종솔로이스츠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3세대에 걸친 음악가들에게 지금도 이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굉장한 일”이라며 “세종에서 보낸 시간이 무척 그립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용재 오닐이 오랜만에 세종솔로이스츠와 함께 하는 ‘힉엣눙크’ 무대에서 선보일 작품은 미국 작곡가 크리스토퍼 테오파니다스의 비올라 협주곡이다. 지난 2021년 제 63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클래식 기악 독주 부문’을 수상했던 곡으로, 이번 연주가 아시아 초연이다.
용재 오닐은 “테오파니디스는 미국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독특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 중 하나”라며 “그가 1악장을 작곡하고 있던 때가 9·11 테러가 발생했는데, 당시의 나도 한 달 전부터 맨해튼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내 삶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끔찍했던 사건 중 하나이자 참담한 경험”이라며 “이 곡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는 용재 오닐의 한국 데뷔 2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그는 “내게 실패는 다시 도전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가는 통로였다”며 “음악 안에서 성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기에 잃은 것은 없다”고 했다. 여전히 처음처럼 음악을 사랑하는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음악을 고민한다. 그는 “음악가에게 기술적 완벽함도 중요하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며 “진정한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선 음악의 깊은 의미와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며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덧 40대가 됐지만, 아직도 음악적 고민이 많아요. 다만 20대 시절의 고민과는 많이 다르죠.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 순간만큼은 삶이 아름답고 괜찮은 거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음악가로서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