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작가가 3년2개월만에 신작 ‘영원한 천국’으로 독자 곁으로 돌아왔다. [은행나무 제공] |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인간의 육신만 지구에 남기고 모든 정신과 신경을 고스란히 빼내 업로드해 홀로그램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상세계 ‘롤라’. 사막이 생겨라 하면 ‘짠’하고 사막이 펼쳐지고, 여우야 나타나라 하면 나타나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천국이다. 하지만 이 천국 안에서조차 권태를 느낀 인간은 결국 ‘드림시어터’라는 주문자 맞춤형 ‘숍 인 숍’(shop in shop) 가상세계를 탐닉한다. 드림시어터는 롤라로 들어오기 전 지구에서 살았던 자기의 삶을 가상현실로 옮겨 온, 그야말로 두 번째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통로다.
38개월 만에 내놓은 정유정 작가의 신작 ‘영원한 천국’은 가상세계를 기반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책 출간 일인 28일 마포구 합정동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정 작가를 만나 하나도 아닌 두 개의 가상세계 ‘롤라’와 ‘드림시어터’를 창조해낸 까닭을 물었다.
“현재 세상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DB)화가 되고 있잖아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같은 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말과 일상, 인생이 데이터로 저장이 되고 있고요. 이게 끝까지 가면 인간이 불멸의 상태에 이르면서 자기 육체를 버리고 데이터화된 인간으로서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홀로그램으로 저장될 수 있다고 상상했어요. 그러다보니 슈퍼컴퓨터를 생각하게 됐죠.”
정유정 작가.[은행나무 제공] |
모든 것이 충족이 되는 가상세계 안에서 인간은 억겁의 시간동안 무엇을하며 살아갈까. 전기차는 없어도 문학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이다.
그는 “저는 인간은 놀이의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이야기로 배우고 이야기로 학습하고 세상도 다 이야기로 배운다”며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유희 놀이도 아마 서사 놀이일 것이다. 그러니 가상세계 안에서 조차 내가 직접 참여한 이야기 극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책의 제목 ‘영원한 천국’은 반어법이다. 결핍이 없는 세계는 권태로운 지옥이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늘 뭔가가 결핍이 돼 있어요. 그럼 그걸 원하고, 노력해서 쟁취해요. 그럼 인생이 좀 더 완벽해지죠. 하지만 좀 지나면 덤덤해져요. 만약 더 욕망할 게 없고 더 이룰 게 없으면 인생이 지루해져요. 뭔가를 계속 찾아야하고, 찾는 와중에도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게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이 모든 게 거저 주어지는 천국이 있다? 이건 오히려 인간에게 지옥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삶은 죽음이 있음으로 인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매운맛’과 ‘순한맛’이 퐁당퐁당 번갈아가며 나온다. 자기 파괴적인 그런 욕망을 다룬 ‘7년의 밤’, ‘종의 기원’, ‘완전한 행복’이 대표적인 매운맛 작품이다.
책 표지. |
이번 ‘영원한 천국’은 인간의 성취적인 욕망, 자유의지를 다룬 순한맛 계열의 작품이다. 그는 인간 태초부터 DNA에 각인된 ‘야성(野性)’을 회복하자는 메시지를 작품을 통해 던진다. 그는 “책을 다 읽고 난 독자가 그 전보다 조금 더 용감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출연한 것은 7만년 전인데, 인간이 비약적으로 과학을 발전시키면서 문명사회에 적응하고 법과 규칙, 관습에 순응하며 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백년 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 과정에서 우린 들판에서의 야성을 잃었죠. 인간이 ‘자기 가축화’됐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인간의 뇌는 몇 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뇌와 별반 다르지 않아 태초에 가진 기질, 즉 ‘야성적 기질’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그는 “살면서 고통을 이겨내야 할 때, 또는 세상에서 나에게 닥쳐온 재앙과 맞서야 할 때 이걸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인 야성을 발휘하는 것”이라며 “(소설 속에서)주인공 임경주를 계속해 벼랑 끝으로 밀어 그의 야성이 깨어나는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이 정 작가가 등단 17년 만에, 장편소설 8편 만에 쓴 첫 로맨스라는 점은 놓쳐선 안되는 포인트다. 미스터리 장르와 합쳐진 로맨스지만, 30대 초반 남녀 두 커플의 로맨스 서사는 순애보의 원형이다.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인스턴트 연애의 대척점에 있다. 하지만 신파로는 빠지지 않으며,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성공했다.
“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연애를 안 하는데, 그게 너무 답답한 거예요. 소설에 로맨스를 끼워 넣은 이유도 ‘얘들아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야, 연애 좀 할래?’라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어요. ‘젊은 친구들아, 괜찮아. 자기 자신을 다 던져서 사랑해도 인생에 결코 마이너스가 아니야’라는 얘기를 막 해주고 싶었달까요.(웃음)”
소설 속에선 차갑고 날카로운 유빙이 떠다니는 시린 겨울바다와 사막여우가 총총 걸어오는 이집트 사막이 등장한다. 모두 작가가 직접 가 본 곳이다. 겨울바다는 훗카이도의 아바시리이고, 사막은 이집트 바하리야다.
“경주는 일생이 불행하고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정도로 황폐한 청년이죠. 온기를 불어 넣을 곳 없는 이 친구를 겨울바다로 상징했어요. 거대한 유빙이 쿵쿵 계속해서 충돌해와 자기 자신에게 균열을 가하죠. 처음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생각했는데 전쟁이 나서 갈 수가 없게 됐어요. 그래서 훗카이도의 유빙지대를 갔죠. 쇄빙선 위에서 밤바다의 유빙을 내려다보는데 저기로 떨어지면 완전히 짖이겨져 죽겠구나 싶더라고요.”
바하리야 사막은 과거엔 바다였던 곳이다. 바다는, 물은, 생명을 담고 키워내는 곳이다. 주인공 해상은 불치병에 걸려 말라가는 여자다. 현재는 모든 생명력이 사라진 마른 몸에 갇혀있지만, 강인하고 포용력 있는 정신은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점에서 사막으로 이 인물을 표현했다.
“소설 속 해상이가 바하리야 사막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후에 연인이 될 제이와 야영하는 장면에서 사막여우가 다가와 땅에 떨어진 포도를 주워먹는 장면이 있어요. 실제로 제가 사막에서 야영할 때 여우가 왔어요. 안개 속에서 여우의 까만콩 같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정말 환상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정 작가는 3년 이상 품다 세상에 내놓은 소설의 모든 구절과 장면, 거기 얽힌 비화를 전하면서도 막상 제본된 책은 맨 앞장에 친필 사인을 하기 위해 펼쳐본 것 이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소설 쓰기는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아요. 첫 소설을 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막막해요. 꽃삽 하나를 들고 알레스카 설원에 서서 도시를 건설해야지 하는 그런 기분이에요. 구역질이 날 정도로 탈고를 거듭한 끝에 낸 책들이라, 8권 모두 지금까지 다시 들춰보질 않았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 소설은 또 언제 나올지 기다려졌다.
“작품 하나를 가지고 독자를 찾아뵙기까지 최소 2년 좀 길면 3년 이 정도는 필요한 기간이에요. 안그러면 최선을 다하지 않은 느낌이 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