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29일 탄소중립법 제8조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청구인과 대리인단이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주소현 기자 |
[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제8조 제1항은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
29일 오후 3시 20분께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이같은 주문이 낭독되자 대심판정 방청석 여기저기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일부 방청객들은 붉어진 얼굴로 숨죽이며 흐느꼈다. 살인적인 폭염과 극한호우에 한숨 짓던 시민들이 오래 기다려온 결정이었다.
이종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29일 오후 헌법소원·위헌법률 심판이 열린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심판정에 입장해 착석하고 있다. [연합] |
이날 헌재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충분치 않아 헌법에 위반된다는 취지로 청소년과 아기, 시민 254명이 제기한 4건의 헌법소원에 전원 일치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국가의 기후위기 대응이 부족하면 기본권이 침해된다는 시민들의 주장이 헌재를 통해 천명된 셈이다.
(관련 기사: 아시아 최초 기후소송 헌법불합치 결정…“미래세대에 과중한 부담”)
헌법불합치 결정에 청구인들과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고, 사건을 대리한 변호사들의 만면에는 미소가 번졌다. 청소년기후소송의 사건을 대리한 이병주 변호사는 “국민 기본법 보호에 현저히 부족했다는 이유로 전원 일치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준 헌재의 결단에 감사드린다”며 “헌재의 결정은 아시아와 유럽 각국의 기후 소송을 통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강화하고 전세계적인 기후위기 극복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가 29일 탄소중립법 제8조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청구인과 대리인단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주소현 기자 |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훌쩍 커버린 청소년기후소송 청구인들은 선고 이후 그간의 소회를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 마이크를 넘기기도 했다.
아기기후소송의 청구인 한제아 학생은 “우리는 미래 세대로 불리지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다”며 “기후위기에서도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호 받아야 하며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저와 예순 한 명의 동생들은 이 판결이 나오기까지 함께 노력했다”며 “앞으로 저와 같은 어린이들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재의 판결이 더 큰 변화를 일으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기후위기비상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개최한 기후 헌법소원 최종선고 관련 기자회견에서 한제아 양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 |
시민기후소송 청구인인 이영경 에너지정의행동 사무국장은 “오늘의 판결은 단순히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판결이 아니라 헌법을 통해, 그리고 정부의 책임으로, 우리의 존엄한 삶을 지켜야 한다는 선언이며, 정의로운 기후 대응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에겐 기후 재난이 일상화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서로 돌보고 함께 사는 삶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도 했다.
헌법재판소가 29일 탄소중립법 제8조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청구인과 대리인단이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주소현 기자 |
심판 대상은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1항으로, 국가온실가스배출량을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35% 이상의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비율만큼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담은 법이다. 이 법 시행령 제3조 제1항은 비율을 40%로 정했다.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이유는 과소보호금지원칙과 법률유보원칙 위반, 두 가지다.
이에 대해 시민기후소송을 대리한 이치선 변호사는 “2031년 이후의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를 법률에 정하지 않은 건 미래 세대 전반적인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가의 기본권 보호 의무를 위반”이라고 풀이했다.
이어 “국민의 기본권에 관한 사항은 국회가 직접 입법해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고 시행령에 위임한 부분을 위헌으로 판결했다”고 설명했다.
헌법재판소가 29일 탄소중립법 제8조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청구인과 대리인단이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주소현 기자 |
공은 국회와 정부로 넘어갔다.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제1항은 2026년 2월 28일까지만 효력이 인정된다.
이에 대해 윤세종 변호사는 “헌법불합치 결정은 법에 따라 모든 국가기관에 기속력을 가지며, 이는 법이 정한 국회와 정부의 의무”라며 “헌재가 제시한 기한 내에 이 위헌성을 해소하는 온실가스 감축경로를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방청한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빠른 대체입법 발의를 약속했다. 이 의원은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할 때 국민들이 법원의 문을 두드린다”며 “이제 정치가 더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 이후의 중장기 목표에 대해 더 과감하고 가열찬 기후 입법을 해야 하는 게 분명해졌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가 29일 탄소중립법 제8조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청구인과 대리인단이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주소현 기자 |
기후환경단체들은 헌재의 판결을 환영하면서 이를 반영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후솔루션은 “헌재의 이번 결정은 비록 늦었지만 다행스럽다”면서도 “이번 결정을 계기로 에너지 전환과 산업 탈탄소의 변혁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태양광과 풍력의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전력 시스템을 전환하는 변화도 신속히 추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세계자연기금(WWF)은 “‘안정된 기후에서 살 권리’는 이미 국제적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국가의 기후 및 자연에 대한 대응이 국제 인권법의 의무를 준수하는 데 필수적”이라며 “한국 정부는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뒤처지지 않도록 이번 결과를 반영한 진일보한 후속 조치를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환경운동연합도 “헌재의 이번 결정이 정부의 불충분하고 불확실한 기후위기 대응 정책의 면죄부가 되어선 안 된다”며 “이 소송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엄중히 받아들여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인 시민들이 주체가 된 기후위기 대응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국회가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