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진의 남산공방] 8월의 역사와 핵무기 효과 논의

지금으로부터 79년전 8월 우리의 광복절이 시작됐다. 반면 일본에는 이 시기에 제2차 세계대전 항복 역사가 있다. 그리고 같은 달 인류 최초의 핵무기 사용 역사도 기록됐다. 그래서 일본의 항복을 핵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역사학자들과 핵전략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그보다 더 복잡한 상황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들의 연구 중 전통주의 시각에서는 미국의 핵무기 사용 이유를 ‘일본 본토 침공에서 예상되는 미국인 생명 피해를 감소시키려는 것’이라 한다.

반면 수정주의 시각에서는 전쟁 막바지에 소련이 참전해 아시아로 진출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주장들이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의 주요 행위자는 미국, 일본, 소련이라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동맹국 소련의 참전이 필수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잠재적 라이벌로 보고 견제하고자 했다.

반면 소련은 참전을 서두르고 있으면서도, 일본에 대해서는 일·소 중립조약의 자동 갱신을 파기하였음에도 “조약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기만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오키나와 패전 이후부터 소련의 중재를 활용해 무조건 항복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하려는 생각도 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미국, 일본, 소련 간 복잡한 관계 속에서 같은 해 8월 6일 미국은 핵무기를 히로시마에 투하했고, 이어 9일 소련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같은 날 미국의 두 번째 핵무기가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당시 미국 핵무기의 대량파괴로 일본 수뇌부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더욱 각성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소련의 선전포고 역시, 소련의 중재를 활용해 종전에 대비하려는 일본의 전략을 무산시켰다는 점에서 큰 충격이었다. 9일 열린 일본 최고회의에서는 이 두 가지 효과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8월 10일 일본의 반응은 복합적이었다. 일본이 본토 결전을 각오한다는 육군장관 명의 성명이 보도되었고, 동시에 일본 외무성은 조건부 항복 의사를 미국에게 라디오 방송으로 제안하였다. 이를 볼 때 그날까지 일본의 의사결정에서 히로시마의 핵무기 피해와 소련의 일본 침공이라는 2중 충격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나가사키의 핵무기 피해는 일본의 의사결정에 영향이 없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결국 8월 15일 일본의 최종 항복 결정까지 과정은 핵무기 효과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8월 10일 이후에도 일본의 육군장관과 육해군총장 등은 결전을 주장했다.

또한 15일 육군의 쿠데타를 진압하고서야 항복 선언이 가능했을 정도로, 항복까지의 행로는 단순하지 않았다. 이렇듯 일본의 항복은 핵무기 효과와도 관련은 있었지만 궁극적인 항복 결정은 복잡한 정치 군사 요인들의 조합이었다.

따라서 8월에 있었던 인류 최초 핵무기 사용 효과를 단편적인 인과관계로만 보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핵무기를 ‘만능의 보검’이라고 하는 북한의 표현은 핵무기 효과를 단편적인 인과관계로 보는 시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오늘날 핵무기 효과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가 필요할 때이다.

숙명여대 석좌교수(전 공군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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