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연합] |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해외 계좌 잔고가 221억원이라 10억원 이상인데도 신고하지 않은 사업가에게 12억 5000만원의 벌금형이 확정됐다. 의도한 범행은 아니었지만 조세회피 방지라는 해외금융계좌 신고제도의 취지를 고려했을 때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게 맞다고 우리 법원은 판단했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노태악)는 국세조정법 위반 혐의를 받은 A씨에게 이같이 판시했다. 대법원은 A씨에게 벌금 12억 5000만원을 선고한 원심(2심)을 수긍하며 판결을 확정했다.
A씨는 1990년대 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패션 관련 제조업체를 창업한 사업가로 알려졌다. 그는 홍콩과 국내를 오가며 사업을 운영했는데 2016년 한 스위스 은행에 1783만 스위스프랑(한화 약 221억원)을 예치하고도 관할 세무서장에게 신고하지 않음 혐의를 받았다.
국세조세조정법상 해당 연도의 매월 말일 중 하루의 잔액이 10억원을 초과하는 해외금융계좌를 가진 국내 거주자는 다음 연도 6월에 이를 신고해야 한다. 관련 규정에 따르면 신고의무 위반 금액이 50억원을 초과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위반금액의 13~20% 수준의 벌금을 내야 한다.
1심은 A씨에게 벌금 25억원을 선고했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박병곤 판사는 지난해 7월, 이같이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A씨)의 신고의무 위반금액이 약 220억 원으로 적지 않은 액수”라고 지적했다.
다만 “아무런 전과가 없고, 기록상 피고인이 국내자금을 해외로 불법 유출했거나 의도적으로 해외금융계좌 잔액을 숨기려고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없다”고 했다. 또한 “수사기관에서부터 1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며 반성하고 있다”고 양형의 배경을 설명했다.
2심에선 벌금액수가 다소 감액됐다. 12억 5000만원이었다. 2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4-3형사부(부장 이훈재)는 지난 5월, 이같이 선고했다.
2심 재판 과정에서 A씨 측은 “공소시효(5년)가 지났다”며 “홍콩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 있어 가족과 함께 홍콩에서 거주하고 있는 동안 이 기간이 지났다”고 주장했다. 실제 A씨 말대로 그가 범죄의 공소시효 기산일인 2017년 7월 1일부터 5년이 지난 2022년 7월 28일에야 귀국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수사기관은 “형사소송법상 ‘범인이 형사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경우’는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며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A씨 측에선 “형사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재반박에 나섰다.
2심은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위반행위를 적발한 서울지방국세청이 2022년 6월께 문답조사를 해 A씨도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A씨가 조세 전문가를 통해 전문적이고 상세한 자문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어 “그럼에도 곧바로 국내로 들어오지 않았고, 달리 국내로 들어오지 않은 특별한 객관적 자료도 찾아볼 수 없다”며 “수사기관 입장에선 홍콩으로 출국한 A씨의 임의출석을 기대하기 어렵고, 소재가 불분명해 당초 예정한 공소시효 완성 전의 공소제기도 곤란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의 판단도 2심과 같았다. 대법원은 “위와 같이 판단한 원심(2심)에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벌금 12억 5000만원 판결을 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