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양영경 기자] 정부가 대규모 플랫폼의 자사우대나 끼워팔기 등을 금지하는 규제안을 다시 추진한다. 국내 연매출 4조원 이상, 시장 점유율 60% 이상 등 구체적인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한 데 따라 구글·애플·메타·네이버·카카오 등이 규제 가시권에 들 전망이다.
다만, 정부는 업계의 반발 속에 법 ‘제정’ 대신 ‘개정’으로, 규제안의 핵심인 ‘사전지정’ 대신 ‘사후추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앞서 정부는 독과점 플랫폼의 반 경쟁행위를 신속하게 차단하겠다며 사전지정제를 골자로 한 ‘플랫폼 공정경쟁촉진법’(플랫폼법) 제정에 힘을 실었지만 스스로 세운 논리를 무너뜨리면서 규제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오른쪽 두번째)이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플랫폼 공정경쟁 촉진 및 티몬·위메프사태 재발 방지 입법방향 당정협의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 |
공정거래위원회는 9일 열린 당정협의회에서 ‘플랫폼 공정경쟁 촉진법 입법 방향’을 보고했다.
공정위는 플랫폼 시장에서 경쟁사업자에 대한 반 경쟁 행위를 차단하고 경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공정거래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개정안은 시장 지배력이 압도적인 플랫폼이 자사우대나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최혜대우 요구 등 4대 반 경쟁행위를 할 경우 ‘사후추정’하는 방식으로 규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특정 플랫폼이 경쟁 플랫폼을 시장에서 축출하거나 시장 진입 자체를 방해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행위를 했을 때, 시장 지배적 플랫폼인지를 따져 더 엄격하게 규제한다는 얘기다.
규율 분야는 중개, 검색, 동영상,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운영체제, 광고 등 6개 분야다.
구체적인 추정 요건은 ▷1개 회사의 시장 점유율 60%이상·이용자수 1000만명 이상 ▷3개 이하 회사의 시장 점유율 85% 이상·각 사별 이용자수 2000만명 이상이다.
현행 공정거래법상의 지배적 사업자 추정 기준보다 독점력이 공고한 경우로 한정하되, 연간 매출액 4조원 미만 플랫폼은 제외하기로 했다. 제시된 기준을 단순 적용하면 구글·애플·메타·네이버·카카오 등이 규제 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배적 플랫폼에는 시장 내 영향력을 고려해 강화된 입증책임이 부여된다. 반 경쟁행위 자체는 물론 이로 인해 시장 내 경쟁이 어떻게 됐는지 입증해야 한다. 단, 경쟁제한성이 없거나 개인정보 보호, 안전 확보 등의 목적일 경우에는 항변권을 충분히 보장하기로 했다.
반 경쟁행위에 대한 과징금 상한은 관련 매출액의 8%로 정했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행위(매출액 6%)보다 높은 수준이다.
아울러 위반 행위를 신속하게 차단하기 위해 임시중지명령 제도도 도입한다. 임시중지명령은 신속한 제재를 위한 장치로, 조사·제재 절차가 마무리되기 전에 공정위가 법 위반이 의심되는 사안을 임의로 중지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앞서 공정위는 지난해 12월 거대 플랫폼을 사전지정하고 법 위반 시 신속하게 규제를 가하는 내용의 플랫폼법 제정을 추진했으나 업계의 반발 속에 지난 2월 원점 재검토에 들어갔다. 이번에 기존 공정거래법 개정 방침을 밝히면서 사실상 플랫폼법은 폐기됐고, 규제의 핵심 방안이었던 사전지정도 사후추정으로 대체됐다.
플랫폼법 추진 당시 공정위가 신속한 규제를 위해 법 제정과 사전지정제를 강조했던 만큼 ‘말 바꾸기’ 행보에 대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충분한 준비 없이 플랫폼법만 밀어 붙인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공정위 관계자는 “사전 지정이나 법 제정을 고집하지 않아도 비슷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면서 “제·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초 의도한 입법의 목적과 효과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없다고 봤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