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김 모씨(32) 씨는 국민연금 개혁 뉴스를 볼 때마다 고민이 많아진다고 한다. 기금 고갈이 가까워지면 수급액이 깎이는 건 아닌지 월급보다 빠르게 오르는 물가에 노후 자금은 얼마나 준비해야 충분할지 걱정이다. 그렇다고 변동성이 큰 주식으로 노후 자금을 굴리는 것 역시 자신의 투자 성향과도 맞지 않다고 한다. 김 씨는 “은행 이자 대비 플러스 알파 정도의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적인 상품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퇴직연금 수익률을 개선하고자 도입한 ‘디딤펀드’가 이달 25일 첫선을 보인다. 디딤펀드는 연초부터 금융투자협회 주도로 자산운용사들이 준비해온 업계 공동 브랜드로, 노후대비 자금 마련에 특화된 상품이다. 예·적금 등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묶인 적립금을 굴려서 은행 이자 플러스 ‘알파(α)’의 수익을 챙겨보자는 취지에서다. 디딤펀드가 안정적인 투자성향의 연금 가입자들의 재테크 문턱을 낮출 수 있을지 주목된다.
▶“1사 1대표 대표 펀드 출격”=1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오는 25일 자산운용사 25곳에서 디딤펀드 상품 1개씩 출시하고 증권사를 통해 판매를 시작한다. 디딤펀드는 주식이나 채권 등 다양한 자산군을 대상으로 운용사 고유의 역량이 반영된 자산배분 전략을 활용해 중장기 수익을 추구하는 연기금형 자산배분펀드 상품이다. 비대면 전용상품으로 증권사 앱을 통해서 손쉽게 가입할 수 있다. 증권사도 직관적으로 디딤펀드를 찾을 수 있게 앱 화면을 구성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판매수수료는 TDF(타깃데이터 펀드) 등과 같은 공모펀드 수준이 될 전망이다.
금투협은 디딤펀드가 업계 공동 브랜드인 만큼 통합 관리해 전략 마케팅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서유석 금투협회장는 작년 초부터 워킹그룹을 출범시키는 등 상품 출시에 공을 들여왔다. 서유석 회장은 “운용사 각사별로 자산배분역량이 집중된 단 하나의 대표상품을 선보일 수 있게 했다”면서 “디딤펀드는 연금투자에 효과적인 밸런스펀드(BF)를 발굴해서 근로자의 연금상품 비교·선택을 돕고 단기 매매가 아닌 장기 자산배분의 연금 문화를 확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예적금 묶인 퇴직연금을 깨워라”=디딤펀드는 시장 중립적 성과를 내는 펀드를 공급해 원리금보장형(예적금) 상품과 실적배당형(주식과 채권형펀드) 상품 사이 일종의 디딤돌 역할을 해내겠다는 게 목표다. 국내 연금 시장에선 ‘예적금 이자 정도만 받아보자’라며 원리금 보장형에 넣어 두는 경우가 87%에 달한다. 이렇다 보니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물가상승률조차 좇아가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다. 최근 5년과 10년간의 연 환산 수익률은 각각 2.35%, 2.07%에 그친다. 높은 수익률보다는 노후 자금만큼은 1원도 잃지 않겠다는 불안감이 상품 선택의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처럼 디딤펀드는 주식은 부담스럽지만 예적금에만 두기는 아쉬운 투자자들에게 적합한 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식 편입비율도 50% 미만으로 제한하고 리스크가 상이한 자산에 분산 투자하도록 설계됐다. 이환태 금투협 본부장은 “그간 연금시장에선 주식·펀드에서 큰 손실을 보면 다시 예적금으로 돌아가는 등 악순환이 반복됐다”면서 “안전과 위험 추구형 중간 성격의 상품을 설계해 투자자들의 선택지를 넓혀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1사 1펀드’로 출시된 만큼 운용사들도 자존심을 건 경쟁을 벌일 전망이다. 삼성자산운용은 글로벌 선진국과 이머징 국가를 중점으로 주식과 채권을 혼합해 분산 투자하는 상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글로벌 주식과 미국·국내 채권 등 전통 자산과 대체자산을 담아냈으며 장기투자 성향에 걸맞는 낮은 운용보수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자산운용은 ‘물가 상승률과 GDP 성장률’의 장기평균인 6% 수준의 수익을 목표로 잡고, 국내·해외 주식채권와 리츠 등 해외 대체투자까지 고루 투자할 전략이다.
▶‘TDF 일색’ 퇴직연금, BF로 ‘양축’ 세운다=TDF 일색였던 투자 선택지도 디딤펀드가 속한 밸런스펀드로 다양해질 전망이다. TDF와 밸런스펀드 모두 기본적으로는 주식과 채권 등 다양한 자산에 분산 투자하는 자산배분 펀드다. TDF가 투자자의 생애주기에 따라 주식과 채권의 비중을 사전에 정한 공식에 맞춰 기계적으로 조정한다면, 밸런스펀드는 투자자의 연령에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경기나 시장 상황에 따라 비중을 조절해 시장대비 추가 수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간 시장에선 밸런스펀드가 연금 상품 성격에도 적합한데도 시장 입지가 유독 약하다는 지적이 적잖았다. TDF가 연금시장을 빠르게 장악한 데다 최근에는 미국 주식 등 ETF까지 가세해 더 밀리는 실정이다. 하지만 생애주기에 따라 위험도가 변하는 TDF와 달리 밸런스펀드의 경우, 일정 수준 위험도를 꾸준히 유지하기 때문에 장기운용에 따른 리스크 관리에도 용이하다는 분석이 많다. 이에 금투협이 디딤펀드를 밸런스펀드로 꾸린 이유 역시 상품 강점에 비해 시장 영향력이 미미하다는 판단도 깔렸다는 설명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연금 선진국의 경우, 밸런스펀드가 탄탄하게 자리 잡고 TDF, ETF 등으로 다변화되는 성장 패턴을 보였지만 한국은 반대”라며 “밸런스펀드는 TDF보다 2~3년 후에 출시, 2018년 폭락장 직전후로 운용을 개시하다보니 타이밍도 따라주지 못했다”고 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그간 OCIO 펀드 등 연기금형 밸런스펀드 라인업이 출시됐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면서 “디딤펀드 흥행 여부는 안정적 수익률을 꾸준히 내느냐에 달렸을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디딤펀드를 디폴트옵션에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는 시장에서 어느 정도 검증된 운용실적이 쌓여야 포함될 수 있을 전망이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개별 근로자의 위험성향에 따른 적합성 원칙이 그대로 준용되는 우리 사전지정운용제도에서 TDF의 조합으로 제시되는 자산배분형펀드는 비효율적”이라며 “밸런스펀드(TRF) 형태의 디딤펀드가 퇴직연금 운용체계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유혜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