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폐지는 상장 기업에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장외시장은 거래가 적고, 상장폐지된 기업은 부실기업이라는 딱지가 붙기 쉬워 자금 조달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거래소의 결정에 불복하는 기업들은 법정에서 2차 대전을 벌이기도 한다.
20일 헤럴드경제가 전자공시시스템(DART)를 분석한 결과 2020년부터 지난 11일까지 코스피·코스닥 상장기업이 ‘상장폐지 결정 효력정지 가처분’ 공시를 낸 횟수는 5년 동안 79회에 달했다(항고·재항고 포함). 같은 기간 한국거래소의 상장폐지 공시가 125회(스팩·펀드 제외)였던 것을 감안하면 절반 가량의 기업이 상장폐지 절차를 멈춰달라고 소송을 제기한 셈이다. 한국거래소의 상장폐지 결정에 대한 무효소송과 별도로 정리매매 등 이후 절차 진행을 막기 위해 제기하는 임시 조치다.
상장폐지는 형식적 상장폐지와 실질적 상장폐지로 나뉜다. 전자는 부도, 자본전액 잠식 등으로 즉시 폐지되거나 관리종목으로 지정된 후 폐지된다. 심사 과정은 없으며 기업의 이의 신청만 가능하다. 실질적 상장폐지는 2009년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생겼다. 횡령·배임, 분식회계, 불성실 공시 등이 발생한 기업을 대상으로 심사를 거친다.
실질 심사 단계는 시장마다 다르다. 코스피 시장에서는 기업심사위원회·상장공시위원회, 2단계 절차를 거친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기업심사위원회와 1·2차 시장위원회, 3심제로 진행된다. 각 단계에서 상장 유지·폐지 또는 개선기간 부여를 결정할 수 있다. 코스피는 최장 4년, 코스닥은 최장 2년까지 개선기간을 받을 수 있다.
기업들은 한국거래소에 상장폐지 또는 실질 심사 사유에 대해 해명하고 개선계획을 제출하는 등 상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상장폐지 효력정지 가처분과 무효 소송은 한국거래소를 설득시키지 못한 기업이 찾는 최후의 보루다.
한국거래소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상장폐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이를 뒤집기는 쉽지 않다. 2018년 주식회사등의외부감사에관한법률(외감법) 개정안 시행으로 상장폐지·실질심사 사유 발생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관련 소송도 증가하고 있다. 감사인 선임기한 단축, 내부회계관리제도에 대한 외부감사 등으로 감사가 엄격해지면서 ‘비적정’ 의견을 받는 기업이 증가하고 있어서다.
2019년 코스닥 상장기업 감마누가 상장폐지 효력정지 가처분을 인용받고, 최종 무효 판결까지 받아낸 것도 영향을 끼쳤다. 감마누는 전자 통신분야 제조·서비스업을 영위하는 기업이다. 감마누는 2018년 3월 ‘2017 사업연도 감사보고서’ 회계법인이 의견거절을 내면서 위기에 몰렸다. 2017년 신규 사업 진출을 위해 인수한 5개 기업에 대한 자금 흐름이 불투명하다는 이유였다.
한국거래소는 2018년 7월까지 개선기간을 부여했으나 감마누는 재감사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했다. 한국거래소는 그해 9월 19일 기업심사위를 열어 이틀 뒤인 같은 달 21일까지 추가 개선기간으로 정해 상장폐지 결정을 내렸다. 무효소송 1심을 심리한 서울남부지법 민사11부(부장 이유형)는 “한국거래소는 다른 특별한 사유가 있는지 충분히 검토한 뒤 상응하는 개선기간을 부여해야 한다. 2일이라는 매우 짧은 추가 개선기간을 부여해 상장폐지 결정을 해 재량권 행사의 한계를 일탈·남용해 무효”라며 상장폐지를 취소하라고 선고했다. 해당 판결은 2020년 8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법조계 관계자는 “감마누 이후 상장폐지 무효 결정을 뒤집은 사례는 없고, 가처분신청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는게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상장폐지가 기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데다 실질심사 대상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기업이 아닌 소액주주들이 연대해 가처분 신청을 하는 경우도 생겨 법적 분쟁을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