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월드컵, 그들에겐 ‘기록’보다 값진 성장의 ‘기억’이 남았다[르포]

23일 ‘서울 2024 홈리스 월드컵’이 진행중인 한양대학교 대운동장에서 한국대표팀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들이 기자가 부탁한 영화 ‘드림’ 속 주인공들의 포즈를 취했다.[김화경 사진작가 제공]

[헤럴드경제=이용경 기자·김도윤 수습기자] “이기면 1승, 2승, 몇 대 몇 그런 숫자들이 기록으로 남겠지. 근데 여기 뭐 우승하고 싶어서 온 사람 있어요? ‘기록’을 남기러 왔는지 ‘기억’을 남기러 왔는지 그건 선수들이 판단합니다.”

2010년 당시 홈리스월드컵을 소재로 한 지난해 영화 ‘드림’에서 극중 축구감독인 윤홍대 역할을 맡은 배우 박서준의 대사다. 지난 23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대운동장에서도 영화 내용과 동일한 홈리스월드컵이 열렸다. 이날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은 각자 어떤 목표와 꿈을 가지고 있었을까. 헤럴드경제는 대회 3일차를 맞은 ‘2024 서울 홈리스월드컵’ 현장을 찾았다.

이날 한국대표팀은 불가리아, 이집트 선수들과 연이어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두 경기 모두 패배.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9대 1, 이집트와의 경기에서는 7대 1로 대패했다. 하지만 영화 속 대사처럼 숫자는 숫자일 뿐. 이날 경기에 출전한 선수와 감독 그리고 관람하러 온 관중들은 모두 ‘기록’보다 더 소중한 ‘기억’을 하나씩 갖게 됐다.

햇빛은 뜨거웠지만 관중들은 “대한민국 화이팅”을 외치며 한국 홈리스대표팀을 응원했다. 점수 차이가 벌어져도 관중들은 끝까지 “괜찮아. 괜찮아. 할 수 있어”를 외쳤다. 고대하던 골이 나올 때는 모두가 일어나 큰 환호와 박수를 쳤다.

경기를 보러 온 박창학(26) 씨는 “축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정식 선수들이 아니고 서로 다른 삶을 살던 홈리스 분들이 경기를 뛰었는데, 네편 내편 할 것 없이 다같이 응원하면서 경기 자체를 즐기고 오히려 다같이 홈리스 분들을 응원해 주는 것 같아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번 홈리스월드컵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권하영(21) 씨는 “홈리스의 주거빈곤이나 건강권에 관심이 있어 자원 봉사를 지원하게 됐다”며 “90분의 축구경기가 아닌 15분(전반·후반 경기시간 7분, 휴식시간 1분) 경기였던 점, 어제(22일) 있었던 비건 축제도 그렇고 많은 부분이 모든 사람을 포용하기 위한 축제 같다”고 말했다.

23일 한양대학교 제1경기장에서 한국대표팀과 이집트대표팀의 경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김도윤 기자]

올해로 19회째를 맞는 홈리스월드컵은 2003년 오스트리아 그라츠를 시작으로 암스테르담, 글래스고, 오슬로, 멕시코시티 그리고 지난해 미국 새크라멘토 등에서 개최됐다. 아시아에서 경기가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경기 주관사인 사단법인 빅이슈코리아는 대한축구협회, 한양대학교 등과 협력을 통해 지난 12월 19일 서울 대회를 유치했다.

홈리스월드컵은 축구를 통해 취약계층 참여자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주거 빈곤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국제 축구대회로, 이번 대회에서는 전세계 38개국 52개팀(남성 36개팀, 여성 16개팀)이 참여한다. 한국대표팀은 자립준비청년, 회복지원시설 거주(경험) 청소년, 지적 장애인, 난민 신청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8명의 선수들로 구성됐다.

팀코리아 대표팀의 주장 김성준 씨(등번호 7번)는 “저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뭔가가 부족해서 온 것일 수도 있다”며 “사각지대에 박혀 살았던 우리가 자신감 있게 축구를 통해서 ‘우리도 힘낼 수 있고 뭔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어 김씨는 “월드컵이 끝나고 다음 목표는 청소년 사회복지사가 되는 것”이라며 “어릴 때 보육원 생활을 하며 형들에게 많이 맞으면서 생활을 했고 그때 정말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었지만, 그때 사회복지사 중에 저를 보호해주셨던 분이 있어서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이집트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득점에 성공한 홍승우 씨(등번호 3번)는 “살면서 처음으로 뭔가에 몰입해서 끝까지 해낸 게 처음이었다”며 “공 하나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될 수 있구나를 몸소 느꼈다”고 했다. 그는 경기를 통해 힘들었던 과거를 극복하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홍씨는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원래 한국을 떠나려고 했었다”며 “사람한테 치이고, 당하고, 가족관계 때문에 힘들어서 도망가다시피 한국을 벗어나고만 싶었다”고 했다. 또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이 저를 보육원에 맡기고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10년이 넘도록 보육원에 있었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보육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보육원 출신이라는 시선이 상처였다”고 술회하면서 전세사기 피해를 겪은 사실도 고백했다. 하지만 홍씨는 “경기를 준비하면서 마음에 문을 열고 제가 바뀌니까 경기가 풀리고 사람들이 절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며 “경기가 끝나면 감독님이 항상 다같이 모여 경기에서 뭘 느꼈는지 얘기해보는 시간을 가지는데, 늘 겉돌고 감정을 밖으로 잘 표출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경기하는 순간 순간마다 하고 싶은 말들을 하고 다같이 뭔가 해내는게 가능하구나를 느낀다”고 말했다.

이집트대표팀과의 경기 전 몸을 푸는 한국대표팀 선수들 모습[김도윤 기자]

전 풋살 국가대표이자 현재 명덕외고 체육교사인 송정섭 코치는 “선수들한테 나를 위한 팀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팀으로 ‘원팀’이 되자고 강조한다”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던 친구들이 원팀이 되기 위해서 규칙도 정하고 규율도 정하고 그런 과정이 쌓여서 하나의 경기력이 나온다”고 했다. 이어 “처음에는 선수들이 수비도 소극적이고, 도움을 주러 가고 규율을 지키고 이런 부분이 부족했지만 지금은 태클도 하고 팀을 위한 희생도 하는 플레이가 나오고 있다”고 호평했다.

전 풋살 국가대표이자 ‘2015 암스테르담 홈리스월드컵’부터 ‘2023 새크라멘토 홈리스월드컵’까지 선수들을 지휘한 이한별 감독은 “대회를 준비하면서 동거동락하며 쌓은 기억들이 선수들에게 경기가 끝나서도 각자의 삶에서 성장 동력이 됐으면 좋겠다”며 “여기서 지원해주는 모든 것들이 삶에서 자극제가 돼 삶을 살아가는데 기억에 남고 인생의 페이지에 한 순간이지만, 큰 인생의 전환 포인트가 됐으면 하는게 목표”라고 했다.

경기가 끝난 뒤 양팀 선수들이 손을 맞잡고 관객들을 향해 인사하는 모습[김도윤 기자]

올해 열린 ‘서울 2024 홈리스월드컵’은 국제축구연맹(FIFA)이 최초로 공인한 대회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FIFA는 이번 대회에 트로피, 메달, 공인구 등을 직접 제작해 지원했으며 FIFA+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한 전 경기 생중계를 지원한다.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홈리스월드컵은 골 수와 승리의 메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축구라는 마법을 이용해 사람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꾼다”며 “이것은 축구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우리 FIFA가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홈리스월드컵을 지원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역할을 다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며 “우리의 목소리를 사용해 홈리스월드컵을 돕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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