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벼리·정석준 기자] #. 서울 강남구에서 요리주점을 운영하는 최모 씨는 매주 배추를 사서 직접 김치를 담그고 있다. 하지만 2주 전부터는 김치 담그기를 그만뒀다. 급작스레 배추 가격이 오른 탓이다. 최씨는 “김치전골 같이 김치가 들어간 메뉴를 주문하면 지금은 안 된다는 식으로 다른 메뉴를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서울 종로구에서 보쌈집을 운영하는 김모 씨도 최근 시름이 커졌다. 음식 특성상 김치를 같이 낼 수밖에 없는데, 최근 배추값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다. 김씨는 “‘김치 좀 더 달라’는 손님이 있으면 총각김치나 다른 밑반찬도 있다고 얘기하긴 하지만, 그래도 김치를 달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천정부지로 오른 배추 가격에 한국인 밥상의 필수 음식 김치가 ‘금(金)치’가 됐다. 유달리 더운 날씨가 오래 이어지면서 여름 배추 물량이 급격히 줄어든 영향이다. 정부에서는 중국산 배추를 수입하는 등 물가 안정 대책을 내놨지만, 가격 안정까지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비축물량을 늘리는 등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25일 aT(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전날 여름(고랭지) 배추 1포기의 평균 소매가격은 9474원이었다. 지난달 하순(21일~월말) 평균(7133원)보다 32.8% 비싸졌다. 작년 9월 하순(6193원)과 비교해도 53% 올랐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9월 하순 가격 중 최대값과 최소값을 제외한 평년 가격(7217원)보다도 31.3% 높다. 한국은행 생산자물가지수에서도 지난달 전체 지수가 119.56에서 119.41로 0.1% 떨어질 때, 배추는 오히려 73% 늘었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해 채소 가격이 크게 오른 24일 오전 서울 한 마트에 배추에 1만6800원이라고 적힌 가격표가 붙여져 있다. 시금치 가격은 지난달에 비해 124.4%, 배추는 73.0% 오른 것으로 조사됐다. [연합] |
배추 가격 급등의 원인은 여름 고랭지 배추 공급량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고랭지 배추 재배 면적이 줄어든 상황에서 폭염과 가뭄까지 겹친 영향이다.
강원도 정선군에서 30년 넘게 고랭지 배추를 재배하고 있는 정모 씨는 “올해는 폭염뿐만 아니라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작황이 매우 안 좋아졌다”며 “고랭지 농사가 들이는 비용과 노력에 비해 수익은 계속 줄고 있어 배추 농사를 접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토로했다.
특히 올해는 정부가 가격 안정을 위해 비축해둔 물량도 동이 났다. 서울에서 사상 첫 ‘9월 폭염경보’가 내려지는 등 유례 없이 길게 이어진 폭염의 여파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여름 배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1만톤의 물량을 비축해뒀는데, 유례 없는 심한 폭염에 강원도 지역이 가물면서 추석 전까지 비축한 물량을 다 쓴 상태”라고 설명했다. 추석 전후로 공급량이 급격히 줄면서 가격이 폭등한 것이다.
갑자기 오른 배추 가격은 외식업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서울 구로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쌀때는 한망(3포기)에 5000원 정도 하던 게 2만4000원까지 올랐다”며 “배추를 사서 직접 김치를 담구는데 올해는 너무 비싸져서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소비자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서울에 거주하는 60대 김모 씨는 “장을 볼 때 늘 배추를 샀는데, 최근에 2만원이 넘어간 것을 보고 배추 대신 고기를 샀다”며 “그 가격이면 굳이 배추를 사먹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배추 가격 안정화에 힘을 쏟고 있다.
농식품부는 우선 수급 안정을 위해 중국에서 신선 배추를 수입할 계획이다. aT를 통해 수입 배추를 시장에 공급하는 식이다. 오는 27일 수입 배추 초도물량 16톤을 들여온 뒤 중국 상황을 보면서 수입 물량을 확대할 방침이다. 아울러 산지 유통인과 농협이 물량을 시장에 조기에 공급할 수 있도록 출하 장려금을 계속 지원하고, 소비자 부담 완화를 위해 다음달 2일까지 대형마트 등에서 최대 40%까지 할인을 지원한다.
정부에서는 가을 배추 물량이 시장에 본격 출하되는 10월 중순부터는 가격이 안정세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고랭지 배추는 보통 10월 중순까지 물량이 나오는데 그 이후로 가을 배추가 많은 물량으로 나오면 가격이 안정세에 접어들 것”이라며 “폭염이 유독 심한 해에는 가을 배추 작황이 좋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올해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배추의 공급량이 평년보다 적은 수준인 데다, 최근 내린 비의 여파로 병해충도 확산될 우려가 크다. 가을 배추의 재배 면적은 1만2870㏊(헥타르)로 1년 전보다 2% 줄었다.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김치를 고르고 있다. [연합] |
전문가들은 비축 물량 확대, 수입처 다변화 등 장기적인 배추 공급량 확보를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후 변화로 한국이 배추 재배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상황이 되고 있다”며 “당장 내년부터 봄배추 비축 물량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산 배추를 판매용 김치 생산 공장에 들이고, 국내산을 시장에 공급하면 물가가 안정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도 “중국산 수입으로 공급 물량을 채우는 것은 가격 안정에 아주 유효한 정책이다. 가격을 안정화해야 국민 피해가 줄어든다”며 “이미 다른 농산물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배추라고 다를 것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기적으로 중국에서도 인건비가 오르고 하면 베트남 등 수입처를 다변화해야할 것”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