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무슨 발레를 하냐.”
아버지의 단호함에도 13살 소년은 자신의 반짝이는 꿈을 굽히지 않았다. 묵묵히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였다. 내내 꿋꿋했던 소년은 어느 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장기 오디션 과정에서 갑자기 훌쩍 자란 키 때문에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돼서다. 현실판 ‘빌리’의 도전은 그 즈음해서 끝나는 줄 알았다. 2017년 SBS ‘영재발굴단’에 출연했던 소년 무용수 전민철(20·사진)이다.
7년의 시간이 지나 한국 무용계를 발칵 뒤집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소년이 러시아 최고 발레단 중 하나인 마린스키 발레단의 오디션에 합격, 내년 2월 솔리스트로 입단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으로는 김기민(32)에 이어 두 번째다.
“그냥 행복했어요. 춤을 출 때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그저 행복하다는 말 외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발레가 왜 그렇게 좋냐는 질문에 그는 마치 빌리처럼 이렇게 답했다. 마린스키 발레단으로 입단을 앞둔 전민철은 한국에서 ‘라 바야데르’(유니버설 발레단)를 통해 첫 전막 발레 데뷔 무대를 가진다.
전민철은 지난해 여름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일주일에 걸쳐 오디션을 봤다. 그는 “클래식 발레를 하고 싶었던 내겐 늘 마린스키가 1순위”라고 했다. 전민철이 오디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마린스키 최초의 한국인 무용수 선배인 김기민 덕분이다. 전민철이 재학 중인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선희 교수를 통해 그를 알게 된 김기민이 유리 파테예프 예술감독에게 전민철의 안무 영상을 보여준 것이 오디션 기회를 만든 계기였다.
오디션 이후 발레단에선 ‘성장형 무용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민철은 “단장님이 ‘한국에서 정말 잘 배웠다. 한국의 스승께 감사하라’고 했다”며 “완성형 무용수는 아니어도 앞으로 더 빛을 발하며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말했다.
선화예중, 예고를 나와 유니버설발레단의 프리미엄 발레교육 브랜드인 줄리아발레아카데미를 거친 그는 202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영재로 조기 입학했다. 184㎝의 큰 키와 팔다리로 만들어내는 우아한 춤선, 탁월한 테크닉, ‘왕자님’ 배역을 도맡을 만한 주역감의 비주얼은 전민철을 차세대 스타로 만들었다. 지난해엔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에서 클래식 파드되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전민철은 “한 번도 발레 스타가 돼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적이 없다”며 “그저 차근차근 제 단점을 고치고 좀 더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갔을 뿐”이라고 말했다.
일찌감치 전민철을 알아본 유니버설 발레단의 문훈숙 단장은 이미 올초 그를 ‘라 바야데르’ 주역 자리에 낙점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전민철이 ‘티켓 파워’가 전혀 없는데다 아직 검증이 안 된 학생 신분이다 보니 반대가 많았던 것. 하지만 발탁 이후 마린스키 입단 등 여러 경사가 겹치자 그를 발굴한 발레단은 ‘최대 수혜자’가 됐다. 전민철이 출연하는 마지막 회차는 스타 무용수들도 해내지 못한 ‘4분컷 매진’을 달성했다. 4분 만에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4층까지, 2080여석 전석을 모두 팔아 치웠다.
전민철은 “나에 대한 기대감이나 궁금증 때문이 아닐까 싶다”며 “내가 관객이라고 해도 ‘얼마나 잘하나’ 지켜볼 것 같다. 그것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대에 부응하게끔 후회가 남지 않는 공연을 만들 것”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다만 ‘라 바야데르’는 쉽지 않은 작품이다. 전사 솔로르는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사랑과 권력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뒤엉킨 관계와 복잡다단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되 용맹한 전사로의 모습을 보여줄 강력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한 춤도 만들어가야 한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