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일(현지시간) 오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 시상식 무대에서 ‘쇼팽: 에튀드’로 피아노 부문에서 상을 받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슈퍼스타 임윤찬’, ‘한국인 피아니스트 최초’ 그라모폰 수상, 역대 최연소 반 클라이번 우승….
피아니스트 임윤찬(20)에게 또 하나의 ‘최초’ 수식어가 생겼다. 이제 임윤찬의 경쟁자는 오직 임윤찬 뿐이다.
임윤찬은 2일(현지시간) 저녁 런던에서 열린 영국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에서 ‘쇼팽: 에튀드’ 앨범으로 피아노 부문과 특별상인 ‘젊은 예술가’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그라모폰을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임윤찬의 이번 수상은 ‘예견된 결과’였다. 올해 시상식의 피아노 부문의 최종 후보엔 총 세 개 앨범이 올랐으나, 이 중 두 장의 음반이 임윤찬의 음반이었다. 그는 ‘쇼팽: 에튀드’와 ‘초절기교 연습곡’ 음반 두 장을 후보에 올렸다. 그라모폰 시상식에서 피아니스트가 한 부문에 2개 음반을 동시에 최종 후보에 올린 것은 임윤찬이 처음이다. 임윤찬은 폴란드 피아니스트 표트르 안데르체프스키와 경쟁했다. 그라모폰 측은 시상식에 앞서 후보를 소개할 당시 “임윤찬이 두 장의 앨범을 최종 후보에 올린 것은 놀라운 업적”이라고 평했다.
임윤찬은 수상 이후 소속사 목 프로덕션을 통해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세상은 모든 것들이 연결돼 있기 때문에 제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듣고 느낀 것들을 포함해 사소한 모든 것이 표현되는 것”이라며 “저희 부모님의 말투부터 제 눈으로 본 모든 것, 그리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 배운 것, 이 모든 것들이 제 음악에 녹아있다. 이런 큰 상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제 가족 선생님, 에이전시, 위대한 예술가들 그리고 제 친구들이다. 저와 제 음악은 제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감사해야 한다”고 담담히 전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예술의전당 리사이틀 [목프로덕션 제공] |
올해 그라모폰 피아노 부문은 ‘임윤찬 대 임윤찬’의 대결 구도가 그려졌다. ‘쇼팽: 에튀드’는 ‘초절기교 연습곡’을 단 한 표 차로 제치고 그라모폰 트로피를 가져갔다.
지난 4월 발매한 ‘쇼팽: 에튀드’는 쇼팽의 27개의 에튀드(연습곡) 중 24개를 연주했다. 음반은 발매와 동시에 엄청난 화제가 됐다. 예술성과 음악적 성취는 물론 대중성까지 모두 챙긴 음반이다. 영국 스페셜리스트 클래식 주간 차트(4월 26일∼5월 2일)에선 발매 직후 1위에 올랐고, 미국 빌보드 클래식 차트 2위(주간 차트, 4월 28일~5월 4일)를 기록했다.애플뮤직에선 클래식을 넘어 전 장르 통합 아티스트 국내 앨범 스트리밍 순위 2위에 올랐다.
국내외 평단의 반응도 좋아, 업계에선 ‘쇼팽:에튀드’의 수상도 일찌감치 점쳐졌다. 음악평론가인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임윤찬의 쇼팽 음반에 대해 “생동감 넘치는 빈틈없는 해석을 들려줬다”고 했고,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임윤찬의 취향과 높은 수준의 음악을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한 음반”이라며 “쇼팽 ‘에튀드’는 연습곡이지만, 임윤찬이 해석한 쇼팽은 모든 번호를 하나의 음악으로 표현했다. 이 장르에서 성취할 수 있는 굉장한 무언가를 이뤄낸 음반”이라고 평했다. 그라모폰 역시 그의 음반이 나왔을 당시 리뷰를 통해 “임윤찬의 쇼팽은 유연하고 깃털처럼 가벼우며 유창하고 열정적”이라면서 “즐겁고 젊음의 활기로 가득하다”고 호평했다.
임윤찬의 쇼팽 음반과 그에 대해선 “젊은 연주자에게선 만나기 쉽지 않은 깊이와 품격을 담았다”는 공통의 평이 나온다. 이는 임윤찬이라는 피아니스트가 가진 가장 독보적인 특질이기도 하다.
류태형 평론가는 “쇼팽의 피아노는 오래도록 갈고 닦은 세월의 흔적과 인생의 경험이 체화해 나오게 된다”며 “마우리치오 폴리니, 마르타 아르헤리치처럼 한 사람이 걸어오는 연주 인생의 구간마다 이정표를 삼을 수 있는 것이 쇼팽인데, 약관의 청년이 이토록 꽉 찬 해석을 들려줬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허명현 평론가 역시 “21세기에 나온 음반이나 한 세기 이전의 피아니스트가 할 법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며 “그가 영감을 받고 좋아한 전설적의 거장의 음악들이 임윤찬의 개성으로 담긴 음반”이라고 했다.
황장현 음악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역시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황 평론가는 “(임윤찬은) 폭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해석을 추구하는 피아니스트”라며 “이번 에튀드 앨범에서 그 같은 면모가 잘 드러났다. (그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아티스트이자 항상 치열하게 연구하고 고민하는 음악가다. 이제 스무 살이 된 피아니스트가 음악에 대한 이 같은 태도를 꾸준히 이어간다는 것이 무척 놀라운 점”이라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일(현지시간) 오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 시상식 무대에서 젊은 예술가 상을 받은 이후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연합] |
“이미 알려진 뛰어난 재능을 제도와 형식으로 인정해준 것.” (허명현 음악평론가)
열여덟 살이던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60년 역사상 최연소로 우승한 이후 그는 전 세계에서 이름을 알렸다. 한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연주 일정을 소화했고, 올해 발매한 첫 독주 음반으론 그라모폰까지 안게 됐다.
그라모폰상은 ’클래식계의 오스카‘로 불린다. 영국의 클래식 음악잡지인 그라모폰이 1977년부터 열고 있는 시상식이다. 2021년 시상식부터 기악(독주) 부문과 피아노 부문을 나눠서 시상하고 있다. 피아노 부문이 분리된 뒤 한국 음악가가 그라모폰 상을 받은 것은 임윤찬이 처음이다.
류태형 평론가는 “영국은 클래식 역사에서 좋은 음악을 감별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그라모폰지를 통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국적과 무관하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을 판단하는 전통을 이어왔다”고 했고, 허명현 평론가는 “지금 현재 가장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공정한 시상식”이라고 봤다.
그간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마우리치오 폴리니, 알프레드 브렌델, 우치다 미쓰코, 유자왕을 비록해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주빈 메타, 서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한국 음악가 중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1990년 실내악 부문과 1994년 협주곡 부문에서, 첼리스트 장한나가 2003년 협주곡 부문에서 수상했다. 1993년 한국계 미국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는 12세 때 ‘젊은 예술가’ 상을 받았다.
임윤찬의 수상을 두곤 여러 의미와 해석이 나온다. 세계 최고 권위의 시상식이라는 점, 한국인 피아니스트로는 ‘최초’의 수상이라는 점, 세계 최정상 음악가들이 받는 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올해 시상식의 대상 격인 ‘올해의 음반상’은 현존 최정상 바이올리니스트인 힐러리 한의 ‘바이올린 소나타’ 앨범이 받았다. 힐러리 한은 기악 부문에서도 수상, 임윤찬과 함께 2관왕에 올랐다. 황장원 평론가는 “수상 아티스트의 면면을 봐도 정상급 아티스트가 포진했다는 점에서 한국 피아니스트 최초의 수상은 무척 고무적이다”라고 봤다.
사실 국내 음악계에서 임윤찬은 10대 초반부터 두각을 보인 연주자였다. 2015년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한 이후 열네 살이던 2018년엔 미국 클리블랜드 청소년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19년엔 윤이상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자로 새 역사를 썼다. 그 때가 고작 열다섯 살이었다.
허명현 평론가는 “임윤찬은 이미 콩쿠르나 음반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불필요한 정도로 대단히 뛰어난 수준의 음악가이나, 이번 음반상은 그의 재능을 제도나 형식을 통해 인정하고 높은 평가를 매겨준 것”이라고 봤다.
실제로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임윤찬의 음악성과 재능은 콩쿠르를 계기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류태형 평론가는 “음악가들은 콩쿠르 이후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한데, 임윤찬은 수면 위로 부상한 이후 진짜 능력을 보여줬고, 매 공연마다 공들여 연주하고 밀도 높은 음악을 들려주며 발전하는 모습을 일관성있게 보여줬다”고 했다. 그라모폰은 이번 수상 이후 “임윤찬은 경이로운 기술이 뒷받침되는 천부적 재능과 탐구적 음악가 정신을 지닌 피아니스트”라고 평했다.
무엇보다 임윤찬의 ‘뛰어난 재능’에 대한 열광과 찬사가 단지 K-클래식이라며 환호하는 한국 안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 주목된다.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 시상식을 생중계한 영국 현지 라디오에선 그를 “슈퍼스타 임윤찬”이라고 소개했다. 임윤찬은 이날 시상식에 참석, 무대에서 리스트 페트라르카 소네트 104번을 연주했다. 미국 매체 보스톤 글로브는 지난 2월 임윤찬의 열광적 팬덤을 ‘리모마니아(Lim-o-mania)’(리스트의 광적인 팬들을 뜻하는 ‘리스토마니아’에서 따옴)라 지칭하기 시작했다. ‘클래식 본고장’인 유럽을 비롯해 북미 지역에선 임윤찬의 등장과 성취를 굉장히 신선하게 지켜보고 있다.
류태형 평론가는 “오랜 도제식 교육과 전통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매번 자신 옆의 뛰어난 재능을 마주하며 가혹한 시험대를 통과해야 하는 클래식 음악가로의 길은 젊은 연주자들에겐 극한 직업과 같다”며 “엄청난 스트레스와 경쟁을 딛고 서야 하기에 점차 서구에선 젊은 음악가들이 나오지 않는데 K-클래식이 주목받는 것도 젊은 연주자 층이 두텁기 때문이다”라고 봤다.
임윤찬은 그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보인다. 정체된 클래식계에 등장한 ‘젊은 재능’이면서도 세간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우직한 면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류 평론가는 “임윤찬은 커다란 바위 같은 연주자”라며 “누구와 닮은 연주자가 아닌 자기만의 유파와 음악세계를 만들 수 있는 연주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만한 젊고 생동감있는 피아니스트로 본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햇다.
아직 스무 살의 임윤찬에겐 그간의 성취보다 앞으로의 길이 더 중요하다. 황장원 평론가는 “현재의 임윤찬은 국제 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이자 티켓 파워에 있어서도 최정상급 피아니스트와 견줘도 밀리지 않을 만큼 애호가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면에서 여러모로 슈퍼스타로 볼 수 있다”며 “다만 이번 수상으로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됐기에 임윤찬이 더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앞으로의 행보를 잘 지켜봐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윤찬은 현재 미국 투어 일정에 한창이다. 그의 ‘금의환향’은 오는 12월이다. 에스토니아 출신 세계적인 지휘자 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5차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한국 관객과 만난다. 임윤찬이 이 곡을 한국에서 연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