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우상’ 구로사와 “늘 빙글빙글 맴도는 듯”…뜻밖의 고백 [부산국제영화제 2024]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참석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그는 이번 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다. [연합]

[헤럴드경제(부산)=이정아 기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69)은 어둠 속에 가려진 인간 내면의 불안을 고요하게 드러내는 공포 영화의 시인이다. 그는 작품에서 불필요한 설명을 덜어낸다. 그렇게 정적인 장면에서 포착되는 감정은 응축된 하나의 상징이 돼 관객의 마음을 서서히 잠식한다. 그의 영화에서 공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차가운 정적 속에서 관객이 스스로 불안과 마주하게 만드는 강력한 계기가 된다. 단순한 충격보다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그만의 연출 기법으로 구로사와 감독은 세계 영화계가 인정하는 거장이 됐다.

그런 그가 “아직 나만의 테마나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다”고 고백했다. 신작 ‘클라우드’, ‘뱀의 길’ 두 편으로 부산을 찾은 자리에서다. 봉준호 감독이 ‘팬클럽 회장’을 자처하는 감독이자 제작 장편 영화만 30여 건에 달하는 그가 전한 뜻밖의 속내다. 칸, 베니스, 로카르노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구로사와 감독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차 방한했다.

봉준호 감독이 영상을 통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을 축하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영상 갈무리.

칠순을 앞둔 그는 40년 이상 영화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빙글빙글 맴돌기만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부족함 없는 영화를 찍고 싶은데, 다 찍고 난 영화를 보면 늘 어떤 부분이 빠져 있다는 거다. 철저한 자기 객관화인지 아니면 겸양의 표현인지 가늠이 잘 안되지만, 지금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그에게서 영화를 향한 한결같은 애정이 느껴진다.

구로사와 감독은 “무엇보다 영화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영화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꼭 지켜야 ‘영화의 길’이 넓어진다는 의미다. 그는 “영화적으로만 가능한 순간이 스크린에 표현되면 관객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없어 못이라도 박힌 듯 스크린에 집중하게 된다”며 “그래야 영화가 끝난 뒤에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구로사와 감독의 신작 ‘클라우드’.

구로사와 감독의 신작 ‘클라우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이들의 원한을 산 전문 리셀러 요시이의 이야기다. 의료 기기, 핸드백 등을 헐값에 사들여 ‘정가의 반값’에 팔던 그는 돌연 다니던 의류 공장을 관둔다. 본격적으로 리셀 시장에 뛰어들어 인생을 바꿔보려는 욕망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시골 마을 호숫가 집을 임대해 “조금 괜찮은 계획”을 실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요시이에게 적의를 품은 이들이 팀을 이뤄 복수에 나선다. 온라인상에서 산발적으로 배출된 증오는 순식간에 집단 광기로 발현된다. 폭력의 연쇄와 파국의 전모를 정밀하게 구조화한 영화는 우리 사회의 그늘을 실체적으로 비춘다는 점에서 판타지 영역을 떠나 동시대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구로사와 감독은 “일상에서 폭력과 인연이 없는 이들이 마지막에 결국 극한의 관계에서 펼치게 될 수밖에 없는 액션을 만들고 싶었다”며 “영화 투자 받기가 쉽지 않았는데 배우 스다 마사키가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서, 캐스팅 이후 제작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했다.

구로사와 감독의 신작 ‘뱀의 길’.
구로사와 감독의 신작 ‘뱀의 길’.

그의 또 다른 신작 ‘뱀의 길’은 1998년에 발표한 동명의 스릴러 영화를 각색해 선보이는 리메이크 작품이다. 원작은 영화 ‘링’ 각본가인 다카하시 히로시가 썼지만, 리메이크작은 구로사와 감독이 저널리스트 오렐리앵 페렌치와 함께 직접 썼다. 영화 배경이 프랑스 현지로 옮겨졌고, 주요 인물인 의사는 성별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다.

영화는 살해당한 여덟 살 딸의 복수를 결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 남자를 전적으로 돕는 일본인 의사는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딸을 납치했던 단체의 실체에 다가설수록 충격적인 진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일본인 의사 역을 맡은 시바사키 코우의 초연하고 서늘한 얼굴이 복수의 본질과 그 파괴적 결과를 날카롭게 통찰하도록 이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인 ‘뱀의 길’은 복수의 교활하고 복잡한 성격이 암시하는 마지막을 은유하는 듯 보인다.

구로사와 감독은 “아빠가 딸의 복수를 한다는 점에서 원작과 리메이크작의 내용은 같다. 그런데 원작에는 살해당한 딸의 엄마이자 복수를 결심한 남자의 아내에 대해 나오지 않는다. 이번 리메이크작은 그런 관점에서 썼다. 그렇다 보니 큰 반전을 주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리메이크작 제작을 제안받았을 때 왜 이 작품을 골랐을까 고민해 봤다. 원작의 각본이 너무 개성 있고 좋았지만, 영화가 내 작품이라기보다는 히로시의 성향이 많이 들어갔던 것 같다”며 “그래서 유독 이 작품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구로사와 감독을 세계적 반열에 올리게 한 영화 ‘큐어’.

구로사와 감독은 ‘간다천 음란전쟁’(1983)으로 데뷔했다. 이후 자신이 직접 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큐어’(1997)로 세계적인 반열에 이름을 올리며 주목을 받았다. 미니멀한 연출과 불안감을 극대화하는 서늘한 분위기, 그리고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모호한 결말이 비평가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으면서다. 이후 ‘도쿄 소나타’(2008)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상, ‘해안가로의 여행’(2014)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감독상, ‘스파이의 아내’(2020)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구로사와 감독은 “영화를 시작한 건 영화 보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였다”며 “그런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내가 아직 못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봐도 부족하지 않은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한 해에만 두 편의 장편 영화를 찍으며 여전히 바쁘게 활동하는 69세 노장이지만, 그는 자기의 색채를 잃지 않기 위해 이토록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한편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축전 영상을 보내온 봉준호 감독에 대해 “그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감독이 되면서 ‘손에 닿지 않는 구름 위에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영상을 보고 ‘아직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구나’ 싶어 기뻤다”며 감사함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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