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최근 종영한 ENA 월화드라마 ‘유어 아너’는 스토리 자체가 흥미를 이끌어내는 콘텐츠지만, 손현주 김명민 같은 관록의 배우가 주연을 맡아 몰입도를 극대화시켰다. 특히 손현주(59)는 ‘유어 아너’를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 배우’로서의 진가를 뽐냈다.
그는 ‘유어 아너’에서 평생을 올곧게 살아온 판사에서 살인 은폐자로 타락한 판사 송판호로 분해 명연기를 펴쳤다. 캐릭터의 감정을 오롯히 시청자에게 전해주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눈빛 연기를 펼친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감정이 이입됐다.
아들의 살인을 은폐하는 판사 송판호와 아들의 살인범을 쫓는 범죄조직 보스 김강헌(김명민 분)이라는, 자식을 위해 괴물이 되기로 한 두 아버지의 부성 본능 대치극을 통해 시청자에게 많은 걸 느끼게 해주었다. 손현주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는 2012년 ‘추적자’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데, 그보다 12년후에 선보인 ‘유어 아너’도 손현주의 명작이라 부를만하다. 여전히 ‘유어 아너’를 못 본 사람이 많다. OTT 등 다른 플랫폼에서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손현주는 1991년 KBS 14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같은 해 MBC에는 한석규가 20기 탤런트로 입사했다.
손현주는 ‘모래시계’, ‘첫사랑’, ‘장밋빛 인생’, ‘솔약국집 아들들’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탄탄한 연기력을 입증했다. ‘시그널’, ‘모범형사’, ‘트레이서’, ‘숨바꼭질’, ‘악의 연대기’, 모범형사 ‘더 폰’ 등 스릴러 계열의 장르물에서도 활약했다. 그는 시대와 장르, 선악을 넘나드는 스펙트럼 넓은 배우다.
손현주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인터뷰 도중 세상을 떠난 친형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어 아너’를 선택한 계기는
▶김재환 작가의 책이 재미있었다. 표민수 감독과 미팅했고, 유종선 감독과의 대화도 흥미로웠다. 제 매니저 일을 10년 넘게 봐주고 있는 장민균 실장이 나에게 “선배는 고생하는 역할을 좀 해야된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따라줄 것이다”고 했다. ‘추적자’때도 고생 많이 했고, 영화도 쉬운 건 안들어온다. 이번에도 그랬다. 심정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보람은 있었다.
재작년 말에 책(대본)을 받았다. 작년에 촬영했어야 했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늦어졌다. 그래서 작년 에 한 게 없다. 올초 방송된 드라마 ‘세작’에서 제의가 왔다. ‘유어 아너’와 스케줄상으로 겹칠 것 같았다. 16부작은 못하겠다고 했다. 카메오라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신세경의 아버지 역할이었는데, 3회에서 유배 가는 것으로 끝났다. 당시 김명민과 전화하면서 “기다려야지”라고 했다. 올해 결과물로 나타나 뿌듯하다.
-’유어 아너’ 원작은 이스라엘판이고, 미국판 리메이크가 있다. 두 판을 봤는가?
▶해외판은 송판호의 딜레마가 초점이다. 국내판은 두 부성애의 대결이 중심이다. 나는 이스라엘, 미국판 둘 다 못봤다. 매니저가 해외판을 보고 한 컷을 보내주었다. 송판호의 모습이 거의 노숙자 차림이었다. 그리고 짧게 편집된 걸 봤다. 김재환 작가가 쓴 건 이들과 다른 드라마다. 표민수 감독에게 물어봤을 때에도 “해외판을 안봐도 된다”고 했다. 포맷을 가져왔지만, 많이 다르다. 원작은 아버지가 아들에게도 살갑게 대하고 부드러웠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서상 그렇게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송판호는 자신의 아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모든 걸 거는 캐릭터로 그려졌다. 때로는 아들이 밉기도 하는 아빠였다.
-송판호 역을 하기가 힘들었을텐데.
▶심리적으로 힘들면 육체도 힘들다. 경기도 연천에 세트가 있었는데, 집에 가지 않고 세트 옆 숙소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집에 가면 아무도 없다. 아들은 철원 백골부대에서 군 복무중이고, 딸은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집에서는 대본이 안보인다. 매니저와 나와서 사는 세월이 많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감춰야할지를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클리셰를 밟아가는 스릴러 공식대로 가지 않으려고도 했다. 연천에서 고통을 보여주는 신들을 많이 찍었다. 형의 별세 소식도 연천에서 받았다. 지병도 없는 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시실을 믿기 어려웠다. 일정상 발인후 세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요즘 형 생각이 많이 난다. 나를 잘 보고 있을 것 같다. 90년대초 제가 방송국에 들어왔을때에도, 제가 손발 오글거리는 연기를 할 때도 항상 저의 응원자였다. 그런 형이 돌아가셨다. 저도 하늘로 올라가면 형에게 ‘어떻게 봤느냐’고 묻고싶다.
-드라마가 전반적으로 무섭더라
▶실제로도 무섭다. 작품에 임했던 배우도 실제 무서움을 느낀다. 나는 현장에서 신에 임할때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100% 정하지 않고 간다. 상황만 이렇구나 하고 간다. 그래서 항상 일찍 간다. 90% 이상이 경기도 외곽, 지방에서 찍었다. 배경도시인 우원시도 서울시가 아닌 곳에 만들어졌다. 현장을 먼저 보고 주위에 뭐가 있는가도 살핀다. 상대가 이렇게 치면 저렇게 연기한 적이 없다. 그냥 견뎌보자, 이미 그 사람의 두려움은 질리도록 겁이 나고, 바탕에는 그것만 생각한다.
김명민이 들어올때, 매우 두려웠다. 덜덜 떨면서 외국인 노동자에게 총격을 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들 호영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캐릭터다. 그러다 9.10부에 가서 처절하게 무너지지 않나.
-힘든 상황에서 눈이 충혈되는 게 인상적이었다
▶눈을 깜빡하지 않으려고 한다. 감정을 흐트리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충혈된다. 그래서 눈이 아프다. 복잡한 감정에서 울고싶을 때 그렇게 된다. 현장에서 감정보다는 그 전(前)감정을 가지고 들어간다. 소시민을 연기할 때, ‘추적자’ 이전에는 눈이 맑았다. 주로 처가집에 얹혀 살면서, 직업도 없고, 정신 못차리는 코믹한 배역도 자주 맡았다. 요즘 MZ세대는 제가 코미디 한 것을 잘 모를 수도 있다. 대학로에서 방송으로 넘어온 저는 목숨 걸고 한다. 우리 같이 생긴 배우는 이렇게 안하면 안된다.
-아들역인 송호영을 맡은 김도훈과의 호흡은
▶아들과는 별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이 아이하고는 우리나라 방식으로는 대화가 없는 부자 사이다. 그 대신 속정이 있다. 의도적으로 장난치지 않았다. 8회때 현장에 왔을때, 도훈을 진심으로 안아준 적이 있다. 뜨거움이 왔고, 그 친구도 뜨거움을 받았을 거고. 그런 속정이 없었다면 드라마를 할 이유가 없다.
김도훈(송호영 역)과 김명민 아들로 나온 허남준(김상혁 역), 김명민의 딸 역할인 박세현(김은 역)은 기존 스타일의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아니더라. 셋 다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김명민과의 호흡은
▶김명민과는 처음 만났다. 그동안 만나고 싶었다. 친구처럼 동료처럼, 좋아하는 동생이다. 남자 배우를 만나면 편안해진다. 연기 대결이 아니고 같이 간다. 드라마가 시작되면 두렵고 무서운 걸 끌어올린다. 김명민을 만나 디테일한 걸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딱딱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부드럽고 여린 친구다.
내가 하고 싶은 이순신 역할은 인지도가 약해 김명민에게 뺏겼다. 나는 원균 역할을 했다. 이번에는 김명민이 원균을 하고 내가 이순신을 하고싶다.
-어긋난 부성애가 이해됐나
▶내가 송판호라면 무조건 자수해 일을 쉽게 풀었을 것이다. 그런데 길을 잘못 가 고생한다. 외국인 노동자 티랍을 안고 김강헌(김명민)을 쐈으면 빨리 끝났을 것인데, 결국 판단미스를 했다. 잘못된 부성애 맞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시즌2가 나올지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게 강조됐으면 좋겠다.
-시청자 반응을 봤는지? 결말에 대한 만족도는
▶제 아내가 티비 앞에 앉는 사람이 아닌데 본방사수하고, 몰입해서 봤다. 동료 지인들에게 연락 오지 않는데, 이번에는 왔다. 결말은 답답하게 보신 분도 있을 것이다. 결말에 선악은 없다. 시즌2가 시작된다면 이제 반성할 때다. 김재환 작가에게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 반성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송판호는 송판호대로, 김강헌은 김강헌대로. 사회를 끌고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성할 것이냐. 시청자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
저는 판사직은 못할 것 같다. 시즌2는 제가 말씀 드릴 건 아니고, 계속 진행된다면 김명민과 다시 한번 만들어보고싶다. 결말은 작가님이 열어놓았다. 잘 논의해서 시즌2가 나왔으면 한다.
-손현주 씨는 극중 고생을 해야한다고 했는데
▶매니저가 고생해야 한다는 이 말에 공감한다. 매니저는 저에게 차를 태워주는 사람이 아니다. 나와 동반자다. 어떻게 봤냐고 항상 물어보는 대상이다. 아직 내가 더 고생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따르겠다고 했다. 편한 역을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제가 제 얼굴을 아는데, 형편 없다. 쉬운 거라면 나에게 주어질까? 이것도 저의 숙명이라면 받아들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