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차게 첫발 내디뎠지만…‘디딤펀드’ 3가지 난제에 빠지다 [투자360]

16일 서울 영등포구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디딤펀드 출범식에서 서유석 금융투자협회 회장과 자산운용사 대표이사 등 참석자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디딤펀드는 노후 자산 마련에 특화한 금융투자 업계의 공용 상품으로, 지난달 말 출시됐다. 연합뉴스

[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지난달 25일 야심차게 출발한 디딤펀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판매사로 나서지 않은 은행, 보험사의 참여를 위해 금융투자협회는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퇴직연금 실물이전’ 전면 시행에 따른 업계 간 이해관계가 복잡한 상황 속에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승인 등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는 점은 난제로 꼽힌다.

18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디딤펀드 출범에 맞춰 신규 펀드를 출시한 운용사 14곳의 지난달 25일부터 전날까지 디딤펀드 운용설정액은 총 221억5500만원이다.

다만, 흥국자산운용이 모그룹 계열사로부터 끌어온 초기 설정 자금 200억원을 제외하면 14거래일 간 자산운용사 14곳의 디딤펀드 운용설정액은 21억5500만원으로 크게 감소한다. 각사 평균 운용설정액은 약 1억5393만원에 불과하다.

한 증권업계 고위 관계자는 “서유석 회장의 의지를 바탕으로 작년부터 금융투자협회와 자산운용사들이 디딤펀드 상품 출시를 위해 역량을 집중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단기간에 성과가 나긴 힘들 것으로 봤지만, 예상보다도 더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 든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디딤펀드는 장기 연금투자의 효과적인 방법인 자산 배분 펀드 중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의 비중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밸런스드 펀드(BF)’ 유형의 업계 공동 브랜드다. 총 25곳의 운용사가 각 1개의 디딤펀드를 출시했다. 이중 15곳은 새롭게 펀드를 출시했고, 10개사는 디딤펀드와 유사한 기존의 BF를 조정해 출시했다. 오는 22일 출시가 예정된 대신자산운용의 디딤펀드는 운용설정액 집계에서 제외됐다.

금융투자업계에선 디딤펀드 구상 단계에서부터 기존 상품과 차별화 과정에서 난항을 겪을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대표적 위험자산인 주식의 비중을 50% 미만으로 목표치를 설정하는 조건이 있는 데다, 주식·채권 등 자산 배분 비중을 일정하게 들고 가는 상품이 이미 많았다는 점 때문이다. 한 외국계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원리금보장형(예적금) 상품과 주식과 채권형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 사이 ‘디딤돌’ 역할을 하겠단 목표를 지닌 게 디딤펀드”라며 “빈틈을 공략하겠다는 의도는 달리 말하면 고객 입장에선 포지션이 불명확하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최근 퇴직연금 시장에서 ‘대세’로 자리잡은 ‘타깃데이트펀드(TDF)’와 수익률 경쟁에서도 디딤펀드가 약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지난 2016년 4월 처음 출시된 TDF는 은퇴 시점과 생애주기에 따라 자동으로 자산을 배분하는 펀드다. 청년기에는 성장주와 고수익 채권 등에 집중해 수익률을 높이고, 은퇴 시기가 가까워지면 배당주와 국채 비중을 높여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글라이드 패스’ 전략을 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TDF 평균 수익률은 10.79%에 이른다. 지난 2018년 이후 연평균 수익률은 8.1%로, 지난 2022년(-14.8%)을 제외하면 매년 업계가 제시한 디딤펀드 예상 수익률 4~6%를 뛰어넘는 성과를 거뒀다.

라이프·은퇴 정보 서비스 업체 아이랩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TDF 목표연도(빈티지, 2025·2030·2035·2040·2045·2050·2055·2060)별 성과 1위 상품의 수익률은 8.86~18.31%에 달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BF 유형의 디딤펀드가 분명 TDF에 비해 변동성이 낮아졌다는 장점이 있지만, 출시 후 8년간 기록한 안정적인 고수익 성과가 예상 수익률 밖에 없는 디딤펀드에 비해 TDF가 가질 수 있는 비교 우위”라고 설명했다. 이어 “판매를 담당할 증권사 영업 인력들도 다년간 홍보를 통해 가입자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은 TDF 대신 시간과 공력을 들여 디딤펀드에 대해 새롭게 설명하고 권할 만한 유인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디딤펀드의 치명적 약점으로는 판매처로 14개 증권사로 한정돼 있다는 점이 꼽힌다. 올해 상반기 기준 퇴직연금 적립액의 약 75%를 보유한 은행·보험사에선 디딤펀드 가입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오는 31일부터 전면 시행되는 ‘퇴직연금 실물이전’에 따른 머니무브로 은행·보험사 퇴직연금 계좌가 증권사로 이동하더라도 디딤펀드가 가진 기본 속성과 고객 수요 간의 ‘미스매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 때문이다. 또 다른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증권사 계좌로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가입자들은 상대적으로 은행, 보험사 가입자에 비해 고위험·고수익 상품을 선호하는데, 디딤펀드의 가장 큰 장점이 안정성인 만큼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짚었다.

지난 16일 서울 영등포구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디딤펀드 출범식’ 이후 기자들과 만난 서유석 회장이 “은행에서도 디딤펀드 판매 규모가 커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마저도 현실은 녹록지 않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원리금 보장 상품을 주로 취급하는 은행 입장에선 디폴트옵션 대상이 아닌 디딤펀드를 라인업에 넣을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금융투자협회 내부에서도 오는 31일로 예정된 ‘퇴직연금 실물이전’ 시행 시점에 겹쳤다는 점도 은행·보험사의 동참을 설득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요인으로 꼽는다. 증권사향(向) ‘머니무브’에 대한 위기감이 커진 은행·보험사의 경계심을 허물고 증권업계를 대표하는 금융투자협회가 주도하는 사업에 동참해달라 호소하기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은행연합회,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등 상시적 소통 창구가 있는 유관 협회들을 대상으로 디딤펀드가 은행, 보험사 등의 영역을 뺏으려는 것이 아니란 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할 것”이라면서도 “퇴직연금 실물이전 관련 전산 구축 문제 등 시급한 현안이 어느 정도 해소된 이후에야 관련 협의에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한다. 앞으로 비포장길만 남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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