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소재 한강 작가의 서점 ‘책방오늘’ 앞 모습. 임세준 기자 |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국내 문학 시장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지만, 예상만큼 활기를 찾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K-문학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지만,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품이나 번역하기 수월한 힐링 소설에 국한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국내 순수 문학의 풀(pool)을 형성하는 신간 출간 마저도 오히려 저조하는 등 순수 문학계 내에서 양극화가 더욱 두드러졌다는 분석이다.
이에 출판계에서는 한강 작가의 수상이 순수문학계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확대하기 보다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번역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는 모양새다. 한강의 시적이며 서정성이 짙은 문장은 소위 ‘글 맛’을 살려야 작품의 진가가 제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즉 한강 역시 탁월한 번역가인 영국 출신 데버라 스미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노벨상 수상이 어려울 수 있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실제로 스미스가 번역을 맡은 이후 한강은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2023년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2024년 노벨문학상 등을 받았다. 한강은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소감 당시 스미스에 대해 “마음이 통한다고 느꼈고, 신뢰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노벨문학상에 대해서도 한국국제교류재단(KF)이 “수상에 스미스 번역가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처럼 좋은 번역가의 중요성이 갈수록 각인되고 있지만, 한강과 데버라 스미스 조합 외에 다른 국내 작가와 번역가의 의기투합은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우리말의 어감을 정확히 살려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며 “순수문학일수록 번역이 더 어렵고 그렇게 번역된 내용도 한국 사회를 잘 모르는 해외 독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렵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해하기 쉬운 내용과, 정교한 번역의 필요성이 다소 경감되는 힐링소설류들이 수월하게 해외에 판권이 팔려, 이른바 ‘K-소설’로 하나의 장르를 구축하고 있다.
힐링 소설은 주인공들이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나 구직 실패 등을 극복하고 인생에서 더 의미 있는 것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묘사한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무기력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 물론 전세계 독자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면서 대세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대표적인 인기 힐링소설이었던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은 지난 2021년 4월 출간 이후 미국, 프랑스, 독일, 중국, 일본, 대만, 태국,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 포르투갈, 브라질 등 23개국에 수출됐다. 대만에선 출간 직후 번역문학 부문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2021년 출간된 황보름 작가의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도 영국, 프랑스, 독일, 브라질, 스페인, 이탈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우크라이나 등 25개국에 수출됐다. 아울러 영어권 계약만 총 25만달러(한화 약 3억4000만원)에 육박하는 선인세로 계약된 윤정은 작가의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2023)는 물론,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유영광, 2023),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미예, 2020)등의 소설이 영미권을 비롯한 다양한 언어권으로 수출됐다.
최근에도 송유정 작가의 ‘기억서점’이 영국과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대만 등 해외 10개국에 선인세로 판권이 수출됐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일부 장르에 국한된 대중적 관심을 K-문학 전반으로 확산시키지는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강을 계기로 다른 K-문학 작가들이 재조명되기 보다 한강 작가 작품들만 품귀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팔리는 모습을 보여서다.
실제로 한강 작가의 작품이 오프라인 서점에서 상위 10개 도서, 전자책 시장에서도 상위 5개 도서를 싹쓸이하고 있다. 덕분에 한강의 작품들은 노벨상 소식이 전해진 지 1주일도 안돼서 100만 부 이상 팔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나무옆의자] |
반면 한강 작품 외에 다른 작품들의 판매는 오히려 저조해졌다. 특히 K-문학의 풀을 형성하는 신간들이 한강의 유명세를 피하고자 출간을 피하는 모양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이번 달(1~22일) 소설부문 신간은 총 241건이 출시됐다. 이는 지난해 10월에 기록한 431건보다 44% 가량 적다. 물론 비교 기간이 1주일 가량 차이가 나지만, 나머지 기간에 200건 가까이 늘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출판 관계자의 전언이다. 즉 한강 작품과 비(非) 한강 작품 간 판매 격차가 벌어진 셈이다.
작품 뿐만 아니라 대형서점과 지역서점 간 격차도 벌어지는 모양새다. 독자들이 한강 작품 재고를 상대적으로 많이 보유한 대형서점으로 몰리면서 이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반면 지역서점들은 독자들의 구매 문의에도 불구하고 재고를 확보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이에 도매 총판을 겸하고 있는 교보문고는 지역서점과의 상생을 위해 이달 말까지 자사에서 한강 작가의 도서 판매를 한시적으로 중단했다.
출판계 관계자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도 불구하고 K-문학에 대한 관심은 한강의 작품과 힐링소설에만 집중되고 있다”며 “묵직한 주제의 순수문학은 더욱 대중에 다가갈 길이 좁아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