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애니’ 두 주역 최은영 곽보경/ 고승희 기자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키 140~145㎝, 열한 살 애니의 선발 조건은 깐깐했다. 뮤지컬이 요구한 ‘신체 조건’에 맞아야 오디션이라도 볼 수 있었다. 최은영은 올해로 4년차. 함께 출연 중인 송일국보다도 ‘뮤지컬 선배’인 그에게 ‘애니’는 초등학생 시절 아역 배우로 무대에 설 수 있는 마지막 오디션이나 마찬가지였다.
“뮤지컬 아역배우는 초등학교 5~6학년 정도가 되면 무대에서 할 수 있는 배역이 거의 없어요. ‘애니’의 오디션 공고가 나왔을 때 이건 정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은영)
무려 137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 아역배우가 거칠 수 있는 주요작(‘빌리 엘리어트’, ‘마틸다’, ‘할란카운티’, ‘내 이름은 무지’)을 모두 거쳤고, 2022년 ‘마틸다’의 주역으로 활약해 신인상을 가져간 ‘실력파’ 최은영과 ‘신예’ 곽보경이 ‘애니’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에서 5년 만에 관객과 만나는 뮤지컬 ‘애니’의 두 주연배우를 최근 서울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났다. 그들은 “영화도 뮤지컬도 좋아해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었는데 5차까지 진행된 오디션은 굉장히 까다로웠다”며 웃었다.
1977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토니상 작품상을 비롯해 7개 부문을 휩쓸며 전 세계에서 사랑받은 고전 명작 ‘애니’는 해롤드 그레이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 소녀 애니와 억만장자 올리버 워벅스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뮤지컬 ‘애니’ 두 주역 최은영 곽보경 [와이엔케이홀딩 제공] |
두 소녀의 ‘애니’ 입성기엔 간절한 열망이 담겼다. 이 작품을 통해 ‘뮤지컬 신예’로 떠오른 곽보경은 “이전엔 키가 큰 편이 아니라서 영양제를 먹으며 관리했는데 ‘애니’의 오디션을 보는 동안엔 키 제한에 걸리지 않으려 키 크는 영양제도 끊었다”고 했다. 최은영은 오디션을 보던 당시 신장이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에 안착했다. 그는 “어쩌면 키 때문에 애니 역할에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키를 잴 때 굽이 없는 신발을 신었다”며 웃었다. 창작진은 아역 배우들이 키가 클 것을 감안해 신장 제한을 두고 선발했다. 현재 두 사람의 키는 각각 최은영이 149㎝, 곽보경이 150㎝다.
권선징악 스토리와 감미로운 선율의 ‘애니’는 ‘클래식 뮤지컬’의 전형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지만, 배우들에겐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애니와 고아원 친구 10명의 아역배우들은 아크로바틱을 활용한 완벽한 칼군무를 선보여야 한다. 특히 애니 역의 배우들은 ‘투모로우’와 같은 명곡은 물론 ‘하드 녹 라이프’처럼 고음을 오가는 노래를 소화해야 한다. 게다가 무대 위의 ‘애니’는 커다란 강아지 샌디(두들 종 산들이)와 호흡을 맞춰야 하기에 무대 위에서 특히나 할 일이 많았다.
최은영은 “다른 작품과 비교해도 워낙 노래가 어려워 혹시라도 고음이 나오지 않을까 너무 걱정했다”며 “특히 ‘투모로우’를 부를 때는 샌디가 다른 사람에게 가거나 무대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지, 여러 돌발행동을 잘 살펴야 해서 신경 쓸 것이 많다”고 귀띔했다.
공연 중반쯤 지나왔을 무렵 샌디 역의 강아지가 바뀌는 일도 생겼다. 애초 골든 리트리버 종인 세 살짜리 콜리와 호흡을 맞췄으나 ‘컨디션 난조’로 현재의 강아지로 교체됐다. 곽보경은 “그동안 은영이와 함께 콜리와 친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콜리가) 아직 너무 어려 컨디션 관리가 힘들었던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뮤지컬 ‘애니’ 두 주역 최은영 [와이엔케이홀딩 제공] |
더블 캐스트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오디션 이후 2~3개월의 연습 기간을 거치며 서로의 성장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최은영은 “처음 보경이를 만났을 때 이제 막 데뷔하는 친구이니 어떻게 연기하고 노래를 할지 너무나 궁금했다”고 돌아봤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는 동료 배우의 모습에 그는 매일이 ‘놀람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데뷔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디테일적인 연기가 뛰어나요. 애니를 연기하며 보경이의 성격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혼자 재밌어 해요. 무엇보다 노래를 너무 잘해요. 사실 제가 성대결절이 오고 2~3개월 만에 뮤지컬을 하는 거라 완쾌 상태는 아니었어요. 보경이가 노래를 너무 잘하니 내가 너무 뒤처지는 건 아닌지, 노래를 너무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더라고요.” (최은영)
최은영의 칭찬에 곽보경도 질세라 극찬을 이어갔다. 곽보경은 “은영이와 비교가 될 것 같아 준비를 많이 했다. 처음엔 부담이 컸는데 은영이의 좋은 점을 캐치해 이렇게 만들어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특히 은영이는 노래를 너무나 잘해 한 번도 고음이 안 올라간 적이 없다. 늘 감탄하게 된다”고 했다.
동갑내기 두 사람은 이번 작품을 통해 같은 꿈을 꾸며 함께 할 수 있는 ‘절친’이 됐다. 늘 “희망을 주는 아이 애니 만큼은 아니지만 처음엔 소심해도 친해지면 재밌는 아이”라고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곽보경과 “애니를 만나 낯가림을 극복했다”는 최은영은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존재다.
뮤지컬 ‘애니’ 두 주역 곽보경 [와이엔케이홀딩 제공] |
더블 캐스트인 데도 두 사람은 매 공연마다 극장으로 와 서로의 무대를 지켜본다.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를 위해 대기 중이나, 두 사람은 이 때마다 서로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된다. 곽보경은 “은영이는 대선배라 연기와 노래를 하는 데에 있어 많은 도움을 준다”며 “무대에 오르기 전 항상 ‘네가 최고고, 넌 최고로 잘 할 수 있다’고 응원해줘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인생을 함께 할 누군가가 없다면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이라는 워벅스의 대사를 ‘애니’에서 가장 좋아해요. 그의 대사처럼 저도 ‘애니’를 통해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를 얻게 된 것 같아요.” (곽보경)
일찌감치 뮤지컬 배우로의 꿈을 키웠지만, 아역배우로 두 사람을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초등학생 배우들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무대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어린아이를 요구하는 데다 비중 역시 크지 않다.
최은영은 “이번 작품이 끝나면 공백기가 있겠지만 몇 년 동안 뮤지컬을 쉬지 않고 달렸으니 어른이 될 때까지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사귀며 지내고 싶다”며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했는데 보경이와 끝나고 함께 놀러가고 싶다”고 말했다. 뮤지컬 배우로의 원대한 꿈도 가슴 한켠에 간직하고 있다. 그의 롤모델은 배우 정선아다. 최은영은 “노래도 연기도 잘하는 데다, 아기를 낳은 이후 더 발전해 돌아온 모습이 너무나 큰 감동이었다. 정말 존경하고 만나고 싶은 분이다”고 말했다.
“어른이 될 때까지 공백기가 길어지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브로드웨이로 오디션을 보러가고 싶어요. 그곳에서 실력을 쌓은 뒤 한국으로 돌아와 멋지게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최은영)
“은영이처럼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해 아쉽다는 마음이 들어요. 이 작품 이후엔 할 수 있는 작품이 거의 없으니까요. 지금은 ‘애니’를 함께 하며 가족같은 배우들을 만나게 돼 매일이 잊을 수 없는 날들이에요. 저도 어른이 돼서 ‘애니’를 함께 선배님들처럼 무대 위에 있고 싶어요.” (곽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