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이 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을 공식 확인해주고 있다. [EPA] |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정보력을 가진 미국이 북한의 러시아 파병을 뒤늦게 인정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는 물론 한국보다 공개적인 정보 확인이 늦은 데다 2022년과 지난해에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북한의 러시아에 대한 무기 지원 등 북러 밀착 행보에 대해 선제적으로 기밀을 공개했던 것과도 대비된다는 지적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정보력 문제가 아니라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중한 행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설은 10월 초 우크라이나 현지 언론 등을 통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인근의 러시아 점령지에서 미사일 공격을 받아 사망한 사람 가운데 북한군 장교가 6명 포함됐다는 보도가 4일(이하 현지시간) 나온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3일 연설에서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북한이 무기 뿐 아니라 병력도 보내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17일엔 북한이 약 1만명을 러시아에 파병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한국 국가정보원도 18일 북한이 1만2000명 규모의 병력을 파병하기로 결정했으며 일부가 이미 러시아로 이동했다면서 관련 위성사진을 같이 공개했다. 국정원은 23일에는 러시아로 이동한 북한 병력을 3000여명으로 제시하는 등 후속 상황도 국회에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국정원의 추가 발표 이후에야 이탈리아에 체류 중인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이 처음으로 북한군의 파병 증거가 있다고 확인했다. 오스틴 장관은 23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북한군 병력이 러시아에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이날 백악관 브리핑에서 “우리는 북한이 10월 초에서 중반 사이에 최소 3000명의 군인을 러시아 동부로 이동시켰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군 파병 관련 언론보도가 사실이라면 우려된다는 수준의 태도를 고수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북러 군사 협력 문제에 기민하게 대응했던 이전 행보와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미국 NSC는 2022년 12월 북한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돕는 민간 용병회사 와그너그룹에 무기를 판매했다고 먼저 발표했다. 이에 북한이 ‘중상모략’이라고 반발하자 지난해 1월에는 위성 사진 등 관련 증거도 공개하며 북한과 러시아를 압박했다.
지난해 3월에는 러시아가 북한으로부터 추가로 탄약을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같은 해 9월 초에는 미국 언론을 통해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방러 및 북러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알리기도 했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에 대한 미국의 정보 확인이 늦은 것은 내부적인 정보 처리 프로세스에 따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미국 정부 내에는 ▷국가정보국(DNI) ▷중앙정보국(CIA) ▷국가안보국(NSA) ▷국가지리정보국(NGA) ▷국가정찰국(NRO) 등 총 18개의 정보기관이 있다. 특정 첩보에 대한 확인은 관련 정보기관이 협력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신뢰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와야 이를 사실로 확인한다. 기밀 정보를 대외에 공개할 경우 출처 등 민감한 정보는 빼면서 보안 수준을 낮추는 절차를 별도로 진행하고 있다.
베단트 파텔 국무부 수석부대변인은 전날 브리핑에서 한국이 북한군 파병 발표에도 미국은 공식 확인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 “미국은 특정 정책 영역과 관련해 어떤 것을 보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 전에 자체적인 프로세스와 자체적인 평가를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존 커비 국가안보 소통보좌관도 이날 백악관 브리핑에서 NSC의 북한군 파병 사실 확인과 관련 “오늘 발표한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정보를 다운그레이드(downgrade·수위 하향 의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의도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파병 확인에 뜸을 들였다는 것이다.
중동에서 확전 우려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국제전으로 확대될 경우 여당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보고 최대한 신중하게 대응했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