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고통 아랑곳 않는 공직자·기업인 자택 앞 시위

현대트랜시스 노조가 지난 26일 현수막과 피켓 등을 동원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한남동 자택 인근 주택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독자 제공]

정부 고위 공직자와 기업인 자택 앞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민폐 시위’가 무분별하게 지속되면서 인근 주민들의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자극적인 글귀로 가득 찬 현수막과 욕설, 여기에 상복을 입고 장송곡을 부르는 등 소란에 가까운 도 넘은 시위에 “정당한 권리 행사를 넘어선 불법 행위”라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28일 재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개인과 노조 등 특정 단체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고위 관료나 기업 총수 자택 인근에서 소음을 발생시키거나 자극적 문구를 게시해 모욕을 주는 식으로 ‘민폐 시위’를 벌이는 사례가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앞서 이달 중순 충남 천안시 원성동 주택재건축정비사업 일부 조합원들이 서울 삼성동 이해욱 DL이앤씨 회장 자택 앞에서 벌인 시위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조합원들은 공사비 인상 등으로 입주에 필요한 추가 분담금이 크게 오르자 사업자인 DL이앤씨와 국토교통부 등을 상대로 ‘뉴스테이 사업 선정 취소 및 일반분양 전환’을 요구하며 상복 차림으로 이 회장 자택과 종로 소재 사옥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빈 자택’ 앞에서 벌어지는 악성 시위도 적지 않다. 지난 7월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은 회사 측과 벌인 협상에서 ‘직원 전용 쇼핑몰 200만 포인트 지급’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울 한남동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자택 앞에서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당시 이 회장은 2024 파리올림픽 참관과 비즈니스 미팅 등을 위해 유럽 출장 중이었다. 때문에 당시 경제계 일각에서는 ‘(전삼노가) 사회적 관심을 끌기 위해 빈 자택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고, 그날 각종 소음과 교통혼잡 등의 피해는 고스란히 인근 주민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한남동 자택 인근도 최근 그룹 부품 계열사인 현대트랜시스 노조가 상경투쟁에 나서면서 ‘시위의 장’이 됐다. 이들 노조는 작년 영업이익과 비교해 2배에 달하는 성과급 등을 요구하며 회사 측과 교섭을 거부하고, 파업을 강행하고 있다.

특히 이날 20여명의 현대트랜시스 노조원들은 주말 오전까지 현수막과 티켓 등을 동원해 주택가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주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정 회장 자택 인근에서 이러한 시위가 벌어진 것은 처음이 아니다. 앞서 2022년에도 은마아파트 재건축추진위가 GTX-C노선이 은마아파트 지하를 통과하는 것에 반발하며 주무부처인 국토부나 우선협상대상자인 현대건설을 제쳐두고, 협의 주체가 아닌 정 회장 자택 근처로 가서 한 달간 강경 시위를 벌인 바 있다.

같은 해 12월 법원이 한남동 주민 대표들이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에 제기한 ‘시위금지 및 현수막 설치금지 가처분 신청’을 대부분 인용하며 이러한 시위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법원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 주민들은 각종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정 회장 자택뿐만 아니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등의 자택 인근에서도 단체 시위가 열려 주민들의 불편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지난 7월에는 한화오션 노조 근로자들이 임금 및 단체협약 교섭이 3개월 넘도록 지지부진하자 서울 가회동의 김 회장 자택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고위공직자들의 자택 인근에서도 크고 작은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2022년 오세훈 서울시장은 자택이던 서울 자양동 아파트 인근에서 마포구 소각장 신설 반대 등 각종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이에 오 시장은 ‘저와 같은 곳에 거주하신다는 이유로 평온하게 하루를 준비해야 할 새벽을 소란스럽게 맞게 해드려서 여러분의 이웃으로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라며 자필 사과문을 단지 입구에 붙이고, 주거 밀집 지역이 아닌 서울 한남동 내 위치한 시장 공관으로 이주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집회·시위의 자유와 함께 주거지역 내 다수 시민들의 평온권 및 학습권도 보호하기 위해서는 집회·시위 요건 관련 더욱 강화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나마 지난 8월부터 국민 의견 수렴을 거쳐 주거지역 등의 집회·시위 소음 기준치를 5데시벨(dB) 또는 10dB씩 하향 조정하는 집회와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 시행령 개정안이 최근 시행됐다. 이에 따라 해당 지역 최고 소음 규제 기준치는 주간 80dB, 야간 70dB 및 심야 65dB 이하로 낮아졌다.

그러나 소음 기준치를 낮춘 것만으로는 피해를 막을 수 없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주간 소음 규제 기준치인 80dB의 경우 지하철 차내 소리와 맞먹는 수준이다. 독일에서는 주거지역 내 집회·시위 소음이 주간 50dB, 야간 35dB을 초과할 수 없고, 미국 뉴욕에서는 집회 신고를 했더라도 확성기를 사용하려면 별도의 소음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아울러 유럽을 비롯해 캐나다와 뉴질랜드 등에서는 집회·시위 중 표출되는 극단적 혐오 표현에 대한 형사처벌도 가능하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지난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71%가 집회·시위 요건 및 제재 강화에 찬성했다”며 “주거지역 내 다수 시민의 권리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도록 글로벌 주요국 수준의 실효성 있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서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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