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오페라발레 수석 무용수 박세은과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김기민이 14년 만에 남녀 주역으로 한 작품에서 만난다. [국립발레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꼬꼬마 시절부터 곁에서 서로를 지켜봤다. “예원학교 시절부터 (박세은) 누나가 춤출 때 따라다녔다”는 ‘초딩’ 소년 김기민. 그는 “어린 시절 세은 누나는 모두의 꿈이었다”며 웃었다.
박세은은 지나온 그 날들을 떠올리며 “어릴 땐 세 살 차이가 엄청 크게 느껴졌다”며 “애기 같았던 (김)기민이가 어느새 어른이 돼 함께 춤을 추게 됐다”며 웃었다.
“누나는 그냥 춤을 잘 추는 예술가가 아니라, 어린 친구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무용수예요. 어렸을 때 누나의 기사에서 ‘집념’이라는 단어를 봤어요. 그때 ‘아, 발레는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 춤이구나’ 라는 마음이 들어 저도 따라 하게 됐어요.” (김기민)
20여 년이 지나 두 사람은 서로의 스타이자 K-발레의 별이 됐다. 파리오페라발레 사상 첫 동양인 에투알(불어로 ‘별’이라는 뜻의 수석무용수)인 박세은(35),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첫 동양인 수석 무용수인 김기민(32)이 한국에서 한 무대에 서는 것은 무려 14년 만이다. 서로 얼굴을 보는 것도 2018년 뉴욕시티발레에서 각기 다른 무대를 꾸민 이후 6년 만이다.
오랜만의 만남에 두 사람은 말 대신 애틋한 표정과 행동으로 마음을 나눴다. 서로를 안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두 사람은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주역을 맡아 오랜만에 한국 관객과 만난다. 발레 스타들의 ‘금의환향’에 이들의 무대(11월 1, 3일·예술의전당)는 티켓 오픈 3분 만에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파리오페라발레 수석 무용수 박세은과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김기민이 14년 만에 남녀 주역으로 한 작품에서 만난다. [국립발레단 제공] |
마린스키 발레단의 중국 공연을 마치고 지난 28일 저녁 입국, 곧장 한국 기자들과 만난 김기민은 “어릴 때부터 따라다닌 누나가 유독 외국인을 잘 뽑지 않는 파리오페라발레의 수석이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며 “누나 춤에 방해되지 않도록 뒤에서 잘 받치겠다”며 웃었다.
박세은도 벅차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파리에서 ‘기민 김’과 공연한다고 자랑하고 왔다. 지금은 전 세계 발레 무용수들이 김기민을 보고 자라는 시대”라며 “‘우주 대스타’인 기민이와 무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돼 감사하고 무척 영광이다”고 말했다.
프랑스어로 ‘인도의 무희’를 뜻하는 ‘라 바야데르’는 네 남녀의 엇갈린 사각관계를 그린다. 아름다운 무희 니키아와 사랑과 권력 사이에서 갈등하는 용맹한 전사 솔로르, 그의 야망에 날개를 달아줄 공주 감자티, 니키아를 욕망하는 승려 브라만 등이 극을 이끄는 주인공이다.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는 볼쇼이발레단의 ‘거장’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버전을 무대로 올린다.
김기민은 명실상부 세계가 놀란 ‘라 바야데르’ 장인이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100회 정도는 무대에 선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이미 2016년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 역으로 한국인 남자 무용수 최초로 ‘브누아 드 라 당스’(무용계 최고 권위의 상)를 받았다.
2010년 유니버설 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에서 호흡을 맞춘 김기민 박세은 [유니버설 발레단 제공] |
박세은은 2015년 파리오페라발레에서 김기민이 ‘라 바야데르’ 공연을 했던 때를 떠올리며 “객석에서 기민이의 공연을 보면서 ‘내가 지금 뭘 본거지, 모든 것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 잘 한다는 표현 그 이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심지어 당시 김기민은 심각한 부상을 앓고 있을 때였는데도 말이다. 그의 무대는 파리오페라발레의 남자 무용수들에게도 엄청난 영감과 꿈을 줬다. 단원들은 김기민의 당시 영상을 보고 또 보며 “부상이래, 근데 이렇게 한대”라며 혀를 내둘렀다. “기민이는 정말 사람이 아니에요.” (박세은)
정작 김기민은 남들보다 같은 작품을 많이 경험한 것이 강점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같은 작품을 많이 출수록 위험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며 “도리어 예전 영상을 보면 그 때가 더 잘했다고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기민이 끝없이 작품을 연구하는 이유다. 박세은이 감탄한 것도 이 지점이다. 두 사람은 이미 전화로 서로의 고민을 나누며 작품 분석과 캐릭터 해석을 오랜 시간 이어왔다.
“기민이와 작품 이야기를 나누며 이 친구는 정말 ‘대가’라고 느꼈어요. 2막 중에 기민이의 생각이 궁금했어요. 뭔가 확고한 답을 줄 거라 생각했는데 기민이는 ‘그 때의 느낌을 봐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본인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의 해석을 하겠다는 자기 확신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어 참 멋지더라고요.” (박세은)
파리오페라발레 수석 무용수 박세은과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김기민이 14년 만에 남녀 주역으로 한 작품에서 만난다. [국립발레단 제공] |
자타공인 ‘연습 벌레’인 두 사람이 만났기에 준비 과정 역시 엄청나게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완벽주의자로 연습을 멈추지 않는 김기민과의 호흡을 꺼리는 파트너도 적지 않다. 그는 “내일부터 총 세 번의 리허설이 있는데, 제게 중요한 리허설은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밖에서의 리허설이다. 이미 우리의 리허설은 다 끝났다고 생각한다. 나의 파트너가 어떤 걸 원하는지 이해하고 느끼는 게 중요하다”며 “그동안 리허설에서 파트너와 충돌하는 일이 드물었다. 이번 리허설에선 누나와의 아름다운 충돌을 꿈꾼다”고 말했다.
명실상부 세계 최정상을 향해 날아올랐지만, 두 사람은 지금도 더 먼 곳을 내다보며 더 나은 무용수를 그린다. 이번 만남은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오른 두 사람에게도 배움의 시간이 되고 있다.
박세은은 김기민에 대해 “자기가 뭘 표현하고자 하는지 확신을 갖고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무용수다. 정답지를 아는 친구와 춤을 추는 기분”이라며 “이번에 많이 배우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나 그는 “2년 후에 파리오페라발레에서 ‘라 바야데르’를 하는데, 기민이와의 무대를 통해 보다 성숙하고 확신에 찬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아 무척 설렌다”고 말했다.
어느덧 두 사람은 ‘포스트 김기민’, ‘포스트 박세은’을 그려가는 모든 후배 무용수들의 꿈이 됐다. 박세은은 “예술은 스스로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며 “후배들이 힘들 때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김기민 역시 “꿈은 많은 방향이 있고 정답이 없기에 무서워하지 않고 폭넓게 나아가길 바란다”며 “그 환경을 만드는 게 어른들과 선배들이 도와줘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