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소년 시선 따라가다 보면…‘난 좋은 어른 되었나’ [요즘 영화]

영화 ‘연소일기’ 스틸컷. [누리픽처스]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미래가 좋아질지 아닐지는 관심 없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정말 지친다.”

오후 여섯 시께 대입 시험을 코앞에 둔 홍콩의 한 고등학교 교실. 청소부가 쓰레기통에서 우연히 발견한 주인 모를 유서에는 체념조차 놓아버린 누군가의 지친 표정이 담겼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고, 빠르게 잊힐 것”이라고 적힌 그 구겨진 종이 속에는, 세상 어딘가를 향한 물음표조차 완전히 사라진, 죽음의 그림자만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정 선생의 손에 전달된 이 유서는 그가 기억 저편에 묻어버린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강렬하게 피어나게 했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억압받는 인생을 살아내야만 했던 열 살 소년 요우제의 일기가, 그렇게 정 선생의 회상과 교차하며 등장한다. 영화는 일기장 주인인 요우제와 정 선생과의 관계를 밝히며 두 번째 막을 올리고, 직선적으로 밀고 나간 하나의 이야기가 두 개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영화 ‘연소일기’ 스틸컷. [누리픽처스]

홍콩 영화계의 거장인 담가명 감독의 지도 아래 공부를 한 탁역겸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 ‘연소일기’가 오는 13일 개봉한다. 중화권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대만 금마장, 홍콩 금장상을 비롯한 아시아 주요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관객상, 남우조연상 등 9개 부문 수상과 함께 2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다. 지난달 열린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커뮤니티비프 리퀘스트시네마 섹션으로 한국 관객과 처음 만났는데, 평점 4.82점(5점 만점)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영화는 상실을 끌어안으며 부서진 관계의 조각을 더듬어 치유하는 여정을 그린다. 팔에 자해 흔적이 가득한 제자, 사랑하는 여인, 병약한 아버지 등 불완전한 인연 사이에서 곪디 곪은 상처를 끝끝내 품어 안는 법을 배우는 정 선생의 응어리진 내면이 장면마다 응축돼 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정형화된 행복을 따르지 않고, 인관관계의 복잡한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과정이 밀도 높게 전개된다.

영화 ‘연소일기’ 스틸컷. [누리픽처스]
영화 ‘연소일기’ 스틸컷. [누리픽처스]

다 크고 나서도 어른이 되지 못한 고독한 정 선생 역할을 맡은 배우 노진업은 “영화 내내 관객은 등장인물들과 기억을 나누고 과거의 상처를 함께 겪으며 문제들을 마주하게 된다”며 “그 상처와 아픈 기억들을 정리하고 어떻게 나아갈지 고민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말했다.

등장인물들이 다소 평면적이어서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서사이지만, ‘시선의 반전’을 꾀한 연출이 눈에 띈다. 아울러 “안녕”하며 먼저 인사를 건네던 천진난만한 열 살 요우제의 입에서 “죄송합니다”는 말이 점차 빈번해지는 장면마다 가슴을 후벼 판다. 영화 곳곳에 배치된 ‘울음 버튼’도 관객의 눈물샘을 수시로 자극한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의 시선을 따라 ‘나는 좋은 어른이 되었나’ 자문하게 되는 쓰라린 영화 밖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다.

영화를 연출한 탁 감독은 “대학 시절 친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 친구가 남긴 유서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며 “이런 경험이 영화 기획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10년 간 시나리오를 작성했지만 번번이 제작되지 않아 좌절했다”며 “내게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고자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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