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여성상·희생과 구원 서사 탈피
시공 초월한 인간의 이야기 속 문제의식
악마의 디테일 입고 사유와 질문의 확장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과 국립오페라단이 함께 한 ‘탄호이저’ 서울 버전[국립오페라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관능적 몸을 감싼 핏빛 란제리가 고통스럽게 일렁인다. 흑백 영상에 담긴 ‘쾌락의 여신’ 베누스의 얼굴에 인간의 감정이 겹겹이 쌓인다. 달콤한 말로 사랑을 맹세하고, 욕망을 찬미하던 탄호이저의 변심. 부정하고 분노하다, 애원하듯 설득하는 베누스는 납득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을 맞은 ‘사랑의 약자’였다. 니콜라 푸생의 ‘미다스와 바쿠스’가 걸린 새하얀 호텔방, 서로를 등진 채 선 두 남녀의 고통스런 ‘사랑의 끝’이다.
지고지순한 연인(엘리자베트)에 질려 욕망을 좇았으나, 또다시 향락에 싫증 내고 성녀에게로 돌아가는 탄호이저. 그가 “나의 구원은 성모 마리아에게 있다”고 선언하자,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미다스와 바쿠스’가 툭 하고 떨어진다. 하나의 세계가 닫히는 순간. 무대 위에 세워졌던 또 하나의 작은 무대(베누스의 호텔)는 공중으로 사라지고, 오페라는 시공을 뒤틀어 무대를 바꾼다.
쾌락과 금욕, 육체와 정신, 팜므파탈과 성녀…. 이원적 세계관은 무너졌다. 세상이 옳다고 규정한 길에서 오페라는 끊임없이 저항한다.
요나 김 연출가는 “중세의 외피를 둘렀을 뿐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이야기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사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와 갈등이 담긴 작품”이라고 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8~1883)의 ‘탄호이저’(10월 17~20일, 예술의전당)가 마침내 한국 관객과 만났다. 국내에서 오리지널 독일어 버전의 ‘탄호이저’를 제작하는 것은 2017년 성남아트센터 이후 7년 만, 국립오페라단이 이 작품을 올리는 것은 1979년 한국어 버전 이후 45년 만이다.
요나 김의 ‘탄호이저’는 사유하는 오페라다. 무대가 막을 내리면, 탐험은 시작된다. 디테일의 베일을 벗겨 숨은 답을 찾아가고,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공연은 대화하게 하는 광장”이라는 요나 김 연출가의 예술관이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돼 전달된 셈이다.
국립오페라단과 요나 김 연출가가 만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13세기 독일 튀링엔. 숲이 울창한 소도시로, ‘루터 종교개혁의 본산’인 바르트부르크 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출발한다. 골격은 단순하다. 중세의 음유시인 탄호이저가 ‘관능의 여신’ 베누스와 ‘순결한 여인’ 엘리자베트 사이를 오가며 갈등하다 쾌락을 욕망한 과오를 반성하고 ‘진실한 사랑’의 여인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내용이다.
요나 김 연출가(독일 만하임국립극장 상임연출가)의 ‘탄호이저’는 파격적 연출과 해석으로 고전을 뒤엎었다. 그는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오페라 본토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페라는 요나 김의 두 번째 한국 작품이다. 그는 2015년 국립오페라단 ‘후궁으로부터의 도주’로 한국 관객과 처음 만났다.
바그너의 ‘탄호이저’는 드레스덴(1845), 파리(1861), 뮌헨(1867), 빈(1875) 등 총 네 개의 버전이 존재한다. 요나 김은 “연출가들은 이 작품을 위촉받으면 어떤 버전을 올릴지 생각한다. 거기에서 연출가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라며 “젊은 시절 바그너의 정제되지 않은 느낌을 살리기 위해 드레스덴 판본과 파리 판본을 섞고, 뮌헨과 비엔나는 참고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김 [국립오페라단 제공] |
요나 김은 이 작품을 서른 두 살 청년 바그너의 변곡점이자, 시대의 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던 바그너 자신을 투영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1막은 파리 버전으로 하되 장식적인 발레 장면은 덜어냈고, 서곡은 15분 길이의 드레스덴 버전으로 연주했다. 2, 3막은 드레스덴 버전으로 삼되, 다소 늘어질 수 있는 부분에선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듬었다”고 한다. 그 결과 ‘탄호이저’ 서울 판본이 나오게 됐다.
요나 김은 스스로를 ‘직관적 연출가’라고 말한다. “오감으로 작품을 받아들여 큰 그림을 구상”하기 때문이다. 작품과의 첫 대면은 “악보와 가사를 놓고 음악을 듣고 읽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단계에선 작품의 2차 자료나 기존의 다른 오페라를 보지 않는다. 악보와 가사, 음원과의 정면 대결을 통해 “작품의 전체 골격과 스토리를 추출”하는 과정이다.
요나 김이 읽어낸 ‘탄호이저’는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이야기”로 “편협한 이중잣대와 그로 인한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사회에 저항하는 한 개인의 자기모순과 딜레마”가 담겼다.
국립오페라단과 연출가 요나 김이 만난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탄호이저’에 드러난 문제의식은 무대 곳곳으로 향했다. 관습과 통념 사이, 사회와 개인 사이의 부조화에서 갈등하는 탄호이저는 바그너 자신이기도 하다. 연출가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가 탄호이저”라고 했다. 바그너가 그려놓은 극단적인 두 여성상(베누스와 엘리자베트)에 대한 재인식은 이 오페라의 핵심이다. 요나 김 연출가는 “관능과 정신, 밤과 낮, 섹스와 플라토닉 등의 이분법으로 여성상을 나눈 것은 바그너의 이론적 실험일 것으로 판단했다”며 “더 효과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극단적 이분 구도를 설정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희생적인 여성상을 강요받은 엘리자베트는 사회의 억압으로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안은 인물이라면, 팜므파탈의 ‘나쁜 여자’로 내몰리는 베누스는 감정에 솔직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단지 사회가 허용하지 않았던 자기 욕망을 드러냈을 뿐이다.
요나 김의 ‘탄호이저’는 두 여성을 “한 사람의 양면성”으로 보고 이 둘을 동등한 분량으로 그리기 위해 ‘서울 버전’을 만들었다.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에게 팽배했던 여성에 대한 클리셰는 물론 ‘여성의 희생과 구원’ 서사를 깨부순다. 애초 바그너가 그린 ‘극단적 여성상’은 정(테제, 엘리자베트), 반(안티테제, 베누스), 합(진테제, 아기를 안고 있거나 임신한 베누스의 요정)의 3단계를 구현한다. 이 과정에서 ‘거룩함의 상징’처럼 여겨진 남성 캐릭터(헤르만 영주, 에센바흐)들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작품을 ‘탄호이저’ 서울 버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독창적 해석이 투영,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 무대여서다.
요나김의 ‘탄호이저’ 서울 버전[국립오페라단 제공] |
무대 위에 ‘의도’가 아닌 것은 없다. 성악가들의 손짓, 의상, 동선, 조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연출가의 메시지가 숨어있다. ‘탄호이저’ 서울 버전은 오감을 깨우는 오페라다. ‘중세의 시간’을 동시대 이야기로 치환, 구태의연한 여성 서사를 지우기 위해 요나 김 연출가는 무대 위 모든 것을 설계했다.
그는 “모티브가 된 실 하나는 한 번 등장한 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옷감을 짜듯 마지막까지 이어져야 한다”며 “연출도 (클래식) 작곡과 비슷하다. 하나의 모티브가 계속 해서 반복하고 변형, 변주하며 코다에 이르러야 하기에, 내게 연출은 ‘장면 작곡’과도 같다”고 말했다.
현대적 연출로 태어난 ‘탄호이저’ 무대는 무수히 많은 상징과 은유의 결정체다. 요나 김 연출가의 큰 그림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있고, 수많은 도구들이 일관된 해석의 방향성을 향해 나아간다. 작품은 일종의 100피스 짜리 퍼즐과도 같았다. 그가 던진 퍼즐조각이 210분(인터미션 제외) 동안 영리하고 민첩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목도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완벽한 ‘떡밥 회수’의 시간엔 쫀쫀한 긴장감이 넘쳤다.
국립오페라단과 연출가 요나 김이 만난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이 작품이 긴 시간 동안 관객을 붙들고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은 치밀함 때문이다. 요나 김 연출가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작품을 방목하지 않는다. 1분 1초도 틀린 것을 못 견뎌 의도적으로 다 계산한다”며 “깨알같이 한 땀 한 땀 다진 디테일이 합쳐져야 밀도가 나오고 긴장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공연에선 무대 위 성악가들이 걸음을 옮기는 속도, 손가락의 각도, 쓰러지는 위치와 시간까지 철저하게 계산해 모든 움직임을 연습했다. 음표 하나 하나에 맞춘 계산이었다. “연습하지 않은 것은 무대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연출가의 판단이 만든 집요한 디테일이다.
덕분에 ‘탄호이저’는 다수 오페라의 고질병도 치료했다. 공중에서 내려오고 올라가는 이중 무대를 완벽하게 설계, 막 전환에 소요되는 시간을 완전히 줄인 것이다. 요나 김 연출가는 “무대가 올라가고 내려오는 속도를 음악에 맞춰 초 단위로 연습했다”며 “톱니바퀴 맞물리듯 맞추고 또 맞추기를 반복했다”고 돌아봤다. 유럽에선 2시간 내외 오페라는 6주, 분량이 긴 바그너 오페라는 8주의 리허설 기간을 두지만, 한국에선 3주에 불과해 작업은 더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치밀한 연습이 도달하는 최종 목적지는 완벽한 무대다.
“관객들은 언제나 직관적으로 느껴요. 그래서 전 늘 ‘인간의 감’을 믿죠. 설명할 수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도 아닌데 숨도 안 쉬고 볼 수 있는 흡인력은 디테일에서 나와요. 한 땀 한 땀 숨을 불어넣은 밀도가 바탕한다면, 싫어도 거부할 수 없죠.”
국립오페라단과 요나 김 연출가가 만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탄호이저’ 서울 버전은 거대한 숨은 그림 찾기다. 요나 김 연출가가 숨겨둔 이스터 에그를 끊임없이 찾아내는 재미가 상당하다. 그의 연출방식은 흥미롭다. 무대 전반을 상징으로 채우면서도 직설 화법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바그너가 사용한 ‘극단적 이분법’은 요나 김을 통해 다시 한 번 극대화됐다. 그는 “영화나 다큐멘터리처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열린 해석으로 아웃라인을 희미하게 가져가면 메시지가 불분명해진다”며 “하나의 기법으로 어떤 테마의 극단화, 단순화가 필요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의상은 등장인물들의 성향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붉은 의상, 붉은 머리의 베누스와 수녀복과 성모상 의상을 오가는 엘리자베트는 물론 합창단의 의상까지 작품에 대한 연출가의 해석 방향성을 담았다. 그는 “합창은 독단적이고 성스러운 척하는 사회를 대변한다”며 “엄격하고 얌전한 블랙과 화이트로 보여줬다”고 했다. 베누스의 요정들이 신는 부슬부슬한 털이 달린 킬힐도 동대문 시장에서 발품을 팔아 구했다. 쾌락의 세계를 상징하는 도구 중 하나였다.
국립오페라단과 요나 김 연출가가 만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오페라 안에선 메이드 복장을 한 여성들의 존재감이 강렬하다. 이들의 존재와 의상에 물음표를 던지는 관객도 적지 않을 수 있다. 요나 김은 중세의 시간성을 덜어내며 메이드 여성들을 “엘리자베트처럼 희생하는 여성상”의 현대화로 보여줬다. 요나 김 연출가는 “이들은 권력의 최하층에 있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여성들이다. 이 여성들을 향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짧은 치마를 입고 킬힐을 신는 메이드 역할의 배우들은 오디션을 통해 요나 김 연출가가 직접 뽑았다. 그의 디렉션을 “일대일로 수행할 수 있는 ‘백지 같은 배우’”로 발굴했다. 욕망의 시선으로 이들을 탐하고 더듬어도 ‘돌덩어리’처럼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것이 연기의 핵심 포인트였다. 이 장면을 통해 권력자 남성들의 위선과 추악함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쾌락과 금욕, 육체와 정신을 이분한 이데올로기는 허상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국립오페라단과 요나 김 연출가가 만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오페라가 저항하는 것은 왜곡된 여성상만이 아니다. 오랜 관습과 통념, 견고하게 구축된 사회 시스템, 진리와 정의를 강요하는 종교에 맞선다. 무대는 기묘하게도 공연 내내 조명과 동선의 교차를 통해 십자가 형상도 보여준다. ‘종교의 시대’를 지배한 맹목적 숭배의 타파는 ‘탄호이저’ 말미에 보다 명료하게 담긴다. 가로로 누운 십자가가 무대 한켠에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3막을 통해서다.
특히 풀밭 위에 십자가 형상으로 둔 교황의 지팡이(바쿨루스) 영상은 바그너의 메시지를 분명히 담았다. 베누스와의 향락을 지탄받고 순례의 길을 떠난 탄호이저는 로마에 도착해 교황 앞에서 죄를 고한다. “교황은 완고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라는 것이 요나 김 연출가의 설명이다. “지팡이에 새싹이 돋아난다면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과 함께 교황은 끝끝내 탄호이저의 죄를 사하지 않는다.
국립오페라단과 요나 김 연출가가 만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3막에선 음악에 맞춰 슬로우모션으로 교황의 지팡이를 담아낸다. 두 지팡이 중 깨져버린 지팡이는 교회의 무너진 권위를 상징한다. 이후 ‘드레스덴 아멘’이 울려퍼질 때 푸른 잔디에 누운 교황의 지팡이 하나만을 클로즈업한다. 마치 지팡이에 새싹이 돋아난 듯한 착시를 불러오는 연출이다. 이 장면은 우면산 기슭으로 올라가 찍었다. 요나 김 연출가는 “세속적 권한이 된 교회는 무너져도 십자가(신)는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탄호이저의 결별 선언에 베누스의 얼굴에 인간적 불안이 중첩되고, 애타게 그리던 탄호이저가 돌아오자 엘리자베트의 얼굴엔 환희가 내려앉는다. 1920년대의 흑백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커다란 영상이 오페라 무대에 등장했다.
요나김의 ‘탄호이저’ 서울 버전[국립오페라단 제공] |
2010년대 이후 유럽의 오페라 무대에 등장한 영상 기법은 일종의 트렌드가 됐다. 한국에선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지만, 동시대 유럽 오페라 트렌드를 이끄는 요나 김 연출가를 통해 국내 관객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그는 4~5년 전부터 무대에서 영상을 활용했다.
5㎏의 카메라를 메고 실시간으로 촬영, 인물들의 감정을 담아낸 영상은 ‘탄호이저’ 연출의 ‘신의 한 수’였다. 영상이 더해지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과 음악을 생생히 마주하게 됐다. 카메라의 각도와 피사체를 담는 위치가 절묘하다. 살아 숨 쉬는 ‘날 것’ 같은 영상을 만들면서도 그 안에 담긴 세련된 감각이 인상적이다. 영상에서의 카메라 각도와 조명의 방향도 모두 요나 김 연출가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때때로 무대 위엔 영상을 촬영하는 벤야민 뤼트케가 올라왔다. 음악의 흐름에 맞게 몸을 움직이며 촬영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국립오페라단과 요나 김 연출가가 만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영상 촬영의 제1원칙은 ‘노래하는 사람은 잡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카메라는 오로지 상황에 몰입한 캐릭터를 담는다. 요나 김 연출가는 “상대방이 노래할 때의 가사와 음악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성악가들이 자신의 노래만 외워 연습에 오죠. 물론 작품 전체의 노래를 알고 있지만, 곡 하나하나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떤 감정을 이야기하는지는 잘 몰라요. 리허설을 통해 성악가들에게 알려줍니다. 지금 이 인물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반응을 해보라고요.”
이 작업을 통해 가수는 배우가 된다. 작품에 몰입이 높아지면 노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카메라가 낯선 성악가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노출하는 것은 모험일 수 있었다. 때문에 요나 김 연출가의 특훈이 시작됐다. 표정 연기의 어색함을 덜어내기 위한 ‘연기 트레이닝’이었다.
국립오페라단과 요나 김 연출가가 만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사랑의 상처로 인한 슬픔은 받아들이는 감정에 따라 굉장히 달라요. 배우가 아니기에 아무리 슬픔 감정을 표현한다 해도 관객이 온전히 느끼기엔 쉽지 않죠. 그래서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오디션을 망치고 집에 가려는데 자동차는 펑크 났고, 비는 오는데 우산까지 없어 멘붕(멘탈 붕괴)이 온 상황’을 생각해보라고 했어요. 그런 다음 가사를 읽어보라고 했죠.” 성악가식 맞춤 연기 지도법이었다.
심지어 그는 “담배를 피지 않는 여성 성악가들과 나머지 공부를 하며 담배를 드는 각도, 손의 방향, 다리를 꼬는 방식까지 연습했다”고 귀띔했다. 헤르만 영주 역할의 남성 성악가들 역시 위선적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음주, 흡연, 목 조르는 연기까지 특훈했다.
영상의 효과는 오페라의 스토리와 정서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라이브 카메라에 담긴 영상만 편집해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감각적으로 만들었다.
국립오페라단과 연출가 요나 김이 만난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요나 김 연출가는 “화면에 비친 인물들의 모습은 관객들의 얼굴이기도 하다”며 “우리를 대표해 상대의 노래를 듣고 반응하는 감정의 매개체이자 통역사”라고 했다. 이 작업을 통해 관객은 이별을 통보받은 베누스의 고통을, 미처 몰랐던 엘리자베트의 욕망을 간접 체험한다. 멀리 떨어진 오페라 무대에선 마주할 수 없는 감정과 인물들의 이중 관계를 선명히 볼 수 있다는 ‘실용적 강점’ 역시 요나 김이 영상을 활용한 이유다.
그는 하지만 “무대의 중심은 성악가와 음악이기에 영상은 잘못 쓰면 독이 된다”고 했다. 영상은 “사람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는 지배력이 크기에 결국은 밸런스 게임”이라고 생각이다. 무대 영상을 흑백으로 유지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는 흑백 톤의 영상이 무대를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 해법으로 봤다. 세피아에 회색을 섞은 흑백은 요나 김 연출가가 선호하는 영상의 색감이다. “적당히 창백하면서도 명암 대비가 잘되는 색상”이라고 한다. 영상의 색은 음악에 따라 톤을 조금씩 달리했다.
국립오페라단과 연출가 요나 김이 만난 ‘탄호이저’ 서울 버전 [국립오페라단 제공] |
컬러가 나오는 장면도 있다. 엘리자베트가 거울을 깨고 자신의 목을 찔러 죽는 장면이다. 피칠갑이 된 장면은 컬러로 마주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이 장면은 요나 김 연출가가 작품 기획 당시 1초 만에 구상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희생적 여성의 모습과 그를 통한 구원 서사를 파괴하며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사회의 요구에 따라 욕망을 부정하고 성녀로 내몰리는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한 방식이다.
작품에선 많은 구상이 있었으나, 애초 기획대로 실현하지 못한 장면도 나왔다. 탄호이저와 엘리자베트가 죽은 뒤 홀로 남은 베누스가 오페라극장을 나와 예술의전당 앞 대로변으로 나오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담는 것이 이 작품의 엔딩이었다. ‘진절머리 나는’ 세상에 대한 저항이었으나, 현장 여건상 기도도 못하게 됐다.
‘탄호이저’ 서울 버전은 보기에 따라 파격과 실험의 총체였다. 장르의 벽을 허물어 오페라와 연극, 영상을 공존하게 한 종합예술의 형태였다.
요나 김 연출가는 “매 작품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객을 ‘하이’하게 만들려고 한다. 설령 ‘이게 뭐냐?’고 화를 내더라도 깨어나게 해야 한다”며 “아무리 집중해서 본다 해도 관객은 15분이 지나면 약발이 떨어진다. 그러면 또 처방을 해야 한다. 이 작품이 예외로 남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극이 돼 새로운 작품으로 태동하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