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프·러 vs. 독·오스트리아·오스만제국
지옥보다 지옥 같던 서부 전선 참호전
기관총·대포알에 ‘괴물’ 독가스도 동원
고기 분쇄기·인간 도살장 등 악명까지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7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는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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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 ◆
제1차 세계대전 중 ‘셸 쇼크’(전투 스트레스 반응)를 겪는 것으로 추정되는 병사 모습. [Castle, W.I. 캐나다 공식 촬영단] |
제1차 세계대전 중 참호전의 모습. [Castle, W.I. 캐나다 공식 촬영단] |
통통한 쇠파리가 눈 주위를 맴돌았다.
살찐 쥐 또한 약 올리듯 가랑이 사이를 쓸고 다녔다. 병사들은 이를 알고도 가만히 있었다. 불개미가 피부를 뜯고 들어간들 미동 하나 없었다. 이들은 수 미터 깊이의 흙 통로에 있었다. 좁고, 축축하고, 썩은 내가 폴폴 나는 이곳에 빼곡히 붙어있었다. “잘 수 없어요. 따뜻한 날은 가끔 있을 뿐이지요. 건조하게 지낸다는 건… 웃긴 일입니다.” 그 시기, 그곳을 겪어본 병사는 훗날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 봄이었다. 장소는 전쟁 양축인 협상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과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 제국 등)이 핵심군이 맞붙은 서부전선의 길고 긴 참호 안이었다.
존 워릭 브룩, 참호전 [IWM] |
포격 소리가 울렸다.
동맹국 소속의 독일 병사들은 그제야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아군의 포병은 협상국 측 영국·프랑스 병사들이 모인 맞은편 참호로 10만발, 어쩌면 100만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독일 병사들은 알고 있었다. 곧 진군 명령이 내려올 것임을.
“포군단이 적 참호를 깨부쉈을 것이다. 안심하고 돌격하라!”
당시로는 상부의 이 말만큼 무책임한 지시가 없었다. 참호란 게 무엇인가. 적군의 포 내지 기관총 난사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 시설이다. 대포알을 쏟아낸들, 그게 적군의 좁디좁은 진지에 정확히 박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번만큼은 그 기적이 일어났으리라 믿고 애꿎은 목숨을 또 거는 셈이었다. 병사들은 우짖으며 들판을 내달렸다. 역시나 적진에서 기관총 세례가 쏟아졌다. 작전은 또 실패였다. 짧은 시간 사이 수천, 많게는 수만이 죽었다. 협상국도, 동맹국도 계속 이런 작전만 펼쳤다. 갑갑하고, 답답한 순간들이었다.
존 싱어 사전트, 개스드(독가스에 중독된 군인들·일부 확대), 1919, 캔버스에 유채, 231×611.1cm,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 |
양측이 소모전만 벌이는 사이, 서로가 가장 치열하게 대치하는 벨기에 이프르 주변에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맹국 참호에서 슬쩍 나온 독일 병사들이 협상국 참호를 향해 다가갔다. 협상국의 기관총 사거리까지 거의 온 이들은, 그곳에 웬 길쭉한 원통을 다닥다닥 놓고선 허겁지겁 뛰어 돌아갔다. 뚜껑이 열린 원통은 녹황색 연기를 뿜었다. 녀석은 바람을 타고 협상국 참호 쪽으로 흘러갔다. 기습전을 하겠다는 얄팍한 수법인가? 협상국 병사들이 쓴웃음을 짓는 순간, 이들 눈과 코에서 피가 뿜어져나왔다. 모두가 똑같이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결과….
존 싱어 사전트, 개스드(독가스에 중독된 군인들·일부 확대), 1919, 캔버스에 유채, 231×611.1cm,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 |
존 싱어 사전트, 개스드(독가스에 중독된 군인들), 1919, 캔버스에 유채, 231×611.1cm,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 |
석양빛 아래 병사들이 나란히 선 채 움직인다.
서로의 어깨 내지 가방을 쥐고 힘겹게 한 발씩 나아간다. 이들 중 상당수는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또 병사 한 무리가 비슷한 모습으로 이끌려 간다. 길 밖에선 부상병들이 찢어진 골판지 조각처럼 널브러져 있다. 영국 화가 존 싱어 사전트의 그림 <가스전(개스드)>다. 이들은 모두 어쩌다 예외 없이 똑같은 상처를 입었을까. 그것은 독가스 탓이었다. 독일군은 협상국과 지난한 싸움을 타파하기 위해 비장의 패를 쥐었다. 그게 바로 화학전이었다. 이들은 그해 4월, 이프르 일대에 170톤 넘는 염소가스를 풀었다. 세계의 대규모 전투사상 독가스가 처음 전면 등장한 순간이었다. 이는 훗날 제2차 이프르 전투로 기록된다.
존 싱어 사전트, 개스드(독가스에 중독된 군인들·일부 확대), 1919, 캔버스에 유채, 231×611.1cm,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 |
시큼한 향의 연기는 몸에 있는 수분과 닿는 순간 염산 성격을 띠었다.
눈과 코, 폐를 녹였다. 병사들이 영문도 모른 채 피를 쏟은 이유였다. 협상국은 상상도 못 한 동맹국의 화학전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러니 사전트의 그림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피로 피를 씻는 작전은 참호전의 악몽, 나아가 1차 대전이 빚은 지옥상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아킬레 벨트라미, 사라예보 사건(일부 확대), 1914, 이탈리아 신문 도미니카 델 코리에레 삽화 |
이보다 앞서 1차 대전은 왜 터졌는지, 어쩌다 참혹한 참호전 양상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부터 보자.
시간을 되돌려 1914년, 6월28일. 발칸 반도의 한 덩이를 차지한 국가 보스니아. 열아홉 살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이날 이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보고 있었다. 이내 군중 틈에 섞였는데, 곧 소매에서 검은 무언가를 꺼냈다. 권총이었다.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탄은 대공 부부의 급소를 뚫었다. 두 사람 다 손 쓸 도리도 없이 숨졌다. 주변 인파에 제압당한 프린치프는, 사실 보스니아 옆 동네 격인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조직 ‘검은 손’의 단원이었다. 프린치프는 발칸 반도 곳곳에 흩어진 동족의 통합을 바란 세르비아계 청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당시 오스트리아는 꿍꿍이를 갖고 이 일대를 기웃대는 외세(外勢)일 뿐이었다. 즉, 오스트리아를 심판하기 위해 테러를 벌인 격이었다. 아킬레 벨트라미가 당시 이탈리아의 신문에 실은 삽화에서 사태를 묘사했다. 정장 차림의 프란치프가 갑자기 권총을 보인다. 먼저 황태자의 경동맥을 끊은 뒤, 두 번째로 황태자 아내의 생명을 앗아간다. 호위병은 일이 벌어진 후에야 뒤늦게 대응하는 모습이다.
아킬레 벨트라미, 사라예보 사건, 1914, 이탈리아 신문 도미니카 델 코리에레 삽화 |
“세르비아는 죽어야만 한다!”
오스트리아에선 이런 구호가 울려 퍼졌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곧 세르비아에 대고 선전포고를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우리와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세르비아를 돕겠다”며 국가 총동원령을 발령했다. 슬라브족의 ‘맏형’으로서 세르비아 대신 맞불을 놓은 셈이었다. 전쟁은 이렇게 오스트리아 대 러시아가 되는가 했는데….
작자 미상, 사라예보 사건 당시 모습 |
같은 해, 8월.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며칠 뒤에는 프랑스에 또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군사 대국인 독일은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수장이었다. 원칙상 오스트리아의 행보를 지지할 의무가 있었다. 물론 참전에 따른 실익도 따졌다. 그 시절 러시아는 삼국동맹과 맞설 기량이 있는 삼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 결성체의 소속원이었다. 독일은 이 기회에 러시아를 견제하는 한편, 잠재적 적국인 영국과 프랑스도 크게 흔들어볼 요량이었다. 열아홉 청년이 쏜 총알 두 발은, 복잡한 외교 광풍 속 돌고돌아 연합 간 싸움으로 번졌다.
존 워릭 브룩, Spotting a German plane |
전쟁의 주 무대가 ‘강 대 강 매치’를 벌일 양 측, 독일과 프랑스 사이 국경선으로 옮겨지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독일이 먼저 움직였다. 독일은 생각이 있었다. 슐리펜 계획이 그것이었다. 전략가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구상했던 이 작전은 단순했다. 우리네 막강한 독일 육군이 국경 왼쪽 프랑스부터 정복한다. 직후, 기차로 실어 나른 병력을 통해 영토 오른편 러시아도 무력화한다. 이게 끝이었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얼마나 빨리 제압할 수 있느냐. 이 계획의 성패는 여기에 달려있었다. 독일 지휘부가 점친 시간은 고작 6주였다.
독일군의 첫 목표는 파리 정벌이었다. 지름길로 가기 위해 독일과 프랑스 사이 끼어있는 벨기에부터 뚫었다. 이후 하루에 40㎞씩 진격했다. 이제 파리가 코앞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예상외로 빨리 지치고 만다. 일단 벨기에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했다. 파리 근처 마른강에서 최후 결전을 벌인 프랑스군 또한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택시, 자전거, 심지어 우유 배달 수레까지 동원하는 모습이었다. 대(對)독일 선전포고를 한 영국(런던과 벨기에는 거리상 아주 가깝다!)의 파견군 또한 머리를 아프게 했다.
부상자를 참호로 데려오는 모습. [영국 공식 촬영단] |
악재가 이어졌다.
아군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상대로도 쩔쩔매고 있었다. 얕봤던 적군 러시아는 예상보다 빨리 태세를 갖췄다. 한쪽은 버티는 프랑스군, 반대편은 그 규모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러시아군…. 독일은 가장 우려했던 상황, 양면 포위에 처하고 말았다. 결국 독일군은 마른강을 장악하지 못했다. 슐리펜 계획이 휴지통에 처박히는 순간이었다. 양군은 벨기에와 프랑스 북동부를 사이에 놓고 대치했다. 이쯤, 어느 측이 먼저랄 것 없이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어느덧 700~750㎞ 길이의 전선이 놓였다. 허구한 날 최악의 살육전이 펼쳐지던 곳, 서부전선이 깔린 배경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모습. 왼쪽에는 ‘셸 쇼크’(전투 스트레스 반응)를 겪는 것으로 보이는 병사가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 공식 촬영단] |
독일은 초조했다.
오스만 제국이 뒤늦게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군 편에 합류해 나름 역할을 했지만, 이 또한 제한적이었다. 국력으로 보든, 지리로 보든, 이번 대전은 언젠가 독일 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1대 3 구도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이 꺼내든 카드가 독가스였다. 하지만 뭉게뭉게 피어난 괴물은 뜻밖에도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독일군 또한 독가스를 처음 쓰는 만큼 이를 잘 통제하지 못했다. 비가 언제 올지, 바람이 어떻게 바뀔지 등 따져야 할 조건이 많았다. 조악한 방독면을 쓴 채 뛰다가 자기들도 중독되기 일쑤였다. 독가스가 전투 전면에 처음으로 쓰인 전투,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전진한 땅은 3마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피를 보고, 그렇게나 깊은 절규를 들어가면서 나아간 거리가 4.8㎞. 겨우, 고작.
크리스토퍼 네빈슨, 의사, 1916, 캔버스에 유채, 57.1×41.2cm,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 |
크리스토퍼 네빈슨이 이 무렵 양측이 벌인 무의미한 교전의 결과를 그린 그림이 있다. 제목은 <의사>다.
머리에 피가 맺힌 병사는 비명을 지른다. 그것은 육체의 통증 탓인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가 앞으로 평생 이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그 옆에는 천을 덮어쓴 시신이 놓여있다. 뒤에는 한 병사가 엉덩이를 드러낸 채 엎드린 자세로 치료를 받는다. 그 또한 껍데기만 있을 뿐, 영혼은 저 멀리로 진작에 떠난 듯하다. 이곳은 정식 병원도 아니다. 대충 짚을 깔고 만든 임시 의료소다. 이들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든, 치료는 이날로 끝일 것이다. 공격을 위한 공격 명령은 이러한 서글픈 죽음만 계속 낳을 터였다.
프랑수아 플라멩, 제1차 세계대전 |
“인류는 미쳤다.” (1916년, 5월23일. 알프레드 주베르 프랑스 육군 중위가 숨지기 하루 전에 쓴 일기)
1차 대전이 3년 차로 접어든 1916년 2월. 독일군은 또 한 번 작전을 세웠다. 군사를 때려 박아 프랑스가 절대 포기하지 않은 요충지를 선점한다. 그다음, 몰려오는 프랑스군을 기관총과 포탄으로 다 죽여버린다. 독일군의 전통(?)답게 이번 전략 또한 이처럼 간결하고 대담했다. 독일군은 베르됭을 짚었다. 그곳은 프랑스 역사가 켜켜이 스며든 천연 유산 같은 땅이었다. 독일군은 기회를 엿봤다. 프랑스군이 서부전선에 정신 팔린 틈을 비집고 들었다. 독일군은 재빨리 베르됭에 뛰어들었다. 시작은 좋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변수를 맞았다. 독일군 입장에선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프랑스 수비군이 신들린 수비 태세를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폭우도 쏟아졌다. 그 사이 전열 정비를 한 프랑스군, 이제는 악밖에 남지 않은 독일군 사이 남은 건 또 소모전뿐이었다. 결과는 프랑스군의 수비 성공이었다. 최종 인명 손실은 프랑스군 사상자 37만여명, 독일군 사상자 33만~44만여명이었다. 이는 베르됭 전투로 불린다. 또 다른 이름은, 고기 분쇄기(Meat grinder).
존 워릭 브룩, 솜 전투 당시 독일군 참호를 점령한 영국군 |
한편 프랑스 솜강에선 또 다른 참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때마침 처음으로 대규모 공세의 주도권을 쥔 영국군은 이번에야말로 독일군 참호를 짓밟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독일 주력군이 서부전선을 떠나 베르됭에 몰려있다는 점 또한 이들 입장에선 호재였다. 영국·프랑스 연합군(협상국)은 먼저 여드레간 독일군 전선을 향해 작정하고 포탄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대포알로 이뤄진 소나기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이번에야말로 전멸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제 모두 걸어가 깃발만 꽂고 오면 전쟁도 끝이다.” 지휘부는 사기를 끌어올렸다. 병사들은 이 말을 믿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건 승리의 여신 아닌, 낫을 든 사신이었다. 애초 참호에 꼭꼭 숨은 독일군을 그저 포격량을 늘려 제압하겠다고 한 게 순진한 발상이었다. 독일군이 곳곳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기관총을 난사했다. 당황한 영국군은 총에 맞고, 지뢰를 밟고, 자기네가 쏜 불발탄에 걸린 채 떼죽음을 당했다. 연합군은 4개월여 혈투 끝에 6마일가량 전진했다. 연합국의 인명 손실은 62만여명이었다. 이를 바쳐 나아간 게 고작 9.6㎞가량이었다. 독일군에게서는 43만~53만여명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현재 솜 전투로 칭해진다. 또 다른 호칭은, 인간 도살장(Human slaughterhouse).
크리스토퍼 네빈슨, 영광의 길, 1917, 캔버스에 유채, 45.7×60.9cm,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 |
네빈슨의 그림 <영광의 길>은 외려 제목 탓에 더 서글프다.
병사들은 영광을 외치며 뛰어들었지만, 이들의 절대다수는 작품 속 두 병사처럼 허무하게 죽었다. 하늘로 올라가야 할 영혼 또한 얽히고설킨 철조망에 걸려 피를 흘릴 듯하다. “전쟁을 시작할 때 있었던 정예병의 다수는 베르됭에서 쓰러졌다. 살아남은 나머지는 전부 솜에서 고꾸라졌다.” 독일군 원수,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의 말이었다.
크리스토퍼 네빈슨, 참호로 돌아가는 병사들, 1914, 캔버스에 유채, 51.2×76.8cm, 캐나다 국립 미술관 |
악순환만 낳는 1차 대전을 끝내러 온 이는 미국이었다.
다급한 독일은 무리수를 남발했다. 그러다 불러낸 게 초강대국, 미국이라는 저승사자였다. 독일은 땅에서는 참호전을 이어가는 동안, 바다에서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 통칭 ‘유보트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해군력이 막강한 영국의 전매특허 전략, 해상 봉쇄령을 뚫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번 작전 또한 간결하고, 대담했다. 잠수함을 무제한 출격시킨다. 협상국 방향으로 움직이는 함선은 무조건 때려 부순다. 이게 다였다. 그런데, 마구 날뛴 잠수함이 건드리면 안 될 배를 침몰시키고 만다. 루시타니아호. 미국의 민간인 128명이 탄 여객선이었다. 독일은 유보트 작전 중단 선언을 하면서까지 미국에 바짝 엎드렸다. 미국의 화를 겨우 잠재웠다.
독일이 1917년, 유보트 작전을 다시 펼치면서 문제는 다시 불거졌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잠수함은 모든 배에 포탄을 먹였다. 이에 미국인들이 탄 배들 또한 재차 공포에 떨어야 했다. 독일은 이 와중에 희대의 얼빠진 짓도 저질렀다. 외무장관 아르투어 치머만은 멕시코 주재 독일대사에게 갈 비밀 전보문을 만들었다. 미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으면 멕시코에 동맹을 제안하라, 독일이 뒤를 봐줄 테니 미국에 맞서라고 꼬드기라는 식의 내용이 쓰여있었다. 영국이 이 작전의 시도를 눈치챘다. 여러 경로를 거쳐 미국에 일러바쳤다. 미국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1917년, 4월.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인 건, 협상국 소속 러시아가 혁명 여파로 전쟁에서 발을 뺀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모든 게 최악이었다.
윌리엄 오펜,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의 평화 서명(일부 확대), 1919, 캔버스에 유채 등, 152x127cm,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 |
미국군이 유럽 땅에 몰려 있었다.
1918년, 3월. 독일은 모든 자원을 쥐어짰다.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공격을 벌였다. 미국군이 오기 전 마지막 총공세, 루덴도르프 공세였다. 양측 모두 또 70만~80만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군은 이번에도 파리에 깃발을 꽂지 못했다. 실패이자 패배였다. 미국군은 그해 8월부터 하루에 1만명 이상 규모로 유럽 대륙을 밟았다. 날개를 단 협상국은 압도적 수 우세로 이른바 백일 전투를 벌였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서부전선을 휩쓸었다. 미국발(發) 회오리의 한기는 서부전선 밖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흐름을 탄 협상국은 각지에서 총력전을 펼쳤다. 10월, 먼저 오스만 제국이 이탈했다. 다음 달에는 오스트리아가 항복했다.
윌리엄 오펜,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의 평화 서명(일부 확대), 1919, 캔버스에 유채 등, 152x127cm,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 |
독일은 더 버티고 싶었다.
그런 독일에 결정타를 날린 건 내부 반란이었다. 오스트리아가 휴전협정을 맺은 그쯤, 독일의 킬 군항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곧 독일 전역으로 이 불씨가 번졌다. 결국,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도망치듯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은 그해 11월11일, 프랑스 콩피에뉴에서 이뤄진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사실상 항복이었다. 갑작스럽게 터진 1차 대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그사이 사상자는 3800만명 이상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윌리엄 오펜,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의 평화 서명(일부 확대), 1919, 캔버스에 유채 등, 152x127cm,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 |
독일은 패전국 중 가장 가혹한 형벌에 처했다.
“전쟁 주범 독일은 20년 내 1320억 마르크(금 기준·당시 약 300조원)를 배상한다.” 1919년. 독일 대표단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맺은 베르사유 조약의 핵심 문장이었다. 이 천문학적 규모의 배상금은 당시 독일 국민총생산의 2년 치에 이를 액수였다.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또한 나름의 대가를 치렀지만, 그래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윌리엄 오펜이 베르사유 조약 당시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맨 앞줄, 숙인 고개와 축 늘어진 어깨만 보이는 이가 독일 측 서명 담당자였다. 맞은 편에 모여있는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 대표단이었다. 여기에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등 모습도 볼 수 있다.
윌리엄 오펜,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의 평화 서명, 1919, 캔버스에 유채 등, 152x127cm,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 |
독일은 이 조약을 감당하기 위해 24시간 내내 돈을 찍었다.
다만 배상금의 값은 금을 기준으로 둔 만큼, 이를 갚으려면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독일 시민은 지쳤다. 마른 체구의 한 남자가 이런 분위기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유년 시절(추정) |
미국 국적의 초기 인상주의 화가. 젊을 적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그는 곧장 촉망받는 초상화가 반열에 올렸다. 다만, 당시로는 파격적인 초상화를 선보이고 이른바 ‘마담X 스캔들’을 겪은 후 영국, 미국 등을 돌며 활동한다. 재차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미국 백악관의 초청을 받을 만큼 성공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 정보부와 손을 잡고 군인과 전장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대표작은 <마담 X>,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등.
영국 런던 출신 화가로, 전쟁 특파원을 아버지로 둔 점이 특히나 눈길을 끄는 지점이다. 그 또한 아버지를 따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응급구호대 자원봉사자로 나선 적이 있다. <의사> 등은 당시 경험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이후에는 전쟁을 주제로 한 입체주의, 미래주의 경향의 작품을 남겼다. 파블로 피카소, 필리포 마리네티 등의 영향을 받았다. 요절한 천재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같은 작업실을 쓴 일도 있다고 한다.
곰브리치 세계사, 에른스트 H. 곰브리치, 비룡소
제1차 세계대전, 피터 심킨스, 제프리 주크스, 마이클 히키, 플래닛미디어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로버트 거워스, 김영사
A. J. P. 테일러,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페이퍼로드
요즘 ‘밀가루 안 먹기’에 도전하고 있는데요. 아직은 ‘피부가 좋아졌다’는 식의 말 대신, ‘무슨 일 있어? 뭔가 슬퍼보여’라는 말만 듣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