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우가 돋보인 계단 ‘햄릿’ vs 삶과 죽음 담은 거울 ‘햄릿’ [백스테이지]

올 한 해 관객과 만난 두 편의 ‘햄릿’
연기인생 60년 안팎 대배우 vs 조승우
거장들의 연기쇼 돋보이게 한 거울
조승우의 런웨이 선보인 23m 계단


하나의 무대가 만들어지기까진 수많은 이야기가 담깁니다. 가장 완벽한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물질하며 자신만의 숨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갑니다. 무대 뒤 모든 존재를 담아 들려드립니다.


배우 조승우가 처음으로 연극에 도전한 신유청 극본ㆍ연출의 ‘햄릿’ [예술의전당 제공]


#1. 우물처럼 깊고, 유리처럼 투명하다. 객석으로 쏟아질듯 기울어진 원형의 무대 위엔 생과 사가 뒤섞인다.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허문 곳. ‘휘익, 휘익’. 음성으로 만들어낸 바람소리에 생을 건너간 영혼이 다시 찾는다. ‘먹물처럼 깊은 밤, 지옥 같은 한숨’(신시컴퍼니 ‘햄릿’ 중)의 끝에서 생을 들여다본다. (배삼식 극본ㆍ손진책 연출 ‘햄릿’)

#2. 창백한 콘크리트가 사방을 에워싼 곳. 권력를 향한 야욕, 교활한 음모와 어리석은 암투가 휘감긴다. 거대한 감옥 안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절규가 넘실댄다. 깊고 높은 계단 너머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나 누구도 넘어서지 않고, 모두가 눈을 감아버리는 폐쇄된 공간. 왕자(햄릿)의 트라우마가 벌겋게 짓물러 오늘을 탄식한다. (황정은 각본ㆍ신유청 연출 ‘햄릿’)


무대 위엔 거대한 거울과 계단이 자리한다. 올 한 해 관객과 만난 두 편의 ‘햄릿’의 무대다. 각각 서로 다른 연출가와 작가의 손을 거쳤지만, 정작 무대를 매만진 사람은 한 명 뿐이다. 한국 공연계의 ‘무대 거장’ 이태섭이다.

한 사람이 설계한 두 편의 ‘햄릿’은 완전히 다른 ‘무대 미학’으로 관객과 만났다. 시대마다 소환됐고, 국경을 넘어 변주된 ‘햄릿’은 누구와 언제 만나느냐에 따라 각자의 이야기가 됐다.

이태섭 무대미술가는 ‘고전 해석의 달인’이다. 셰익스피어부터 안톤 체호프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햄릿’은 이번이 세 번째다. 원전의 깊이 있는 탐구는 일찌감치 했고, 수많은 자료 조사로 매 작품의 콘셉트에 맞춰 곱씹고 체화한 무대 미학을 풀어낸다. 그는 “연출의 방향이 달랐기에 두 작품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연극계 거장 배우들이 총출동하고 손진책이 연출을 맡은 ‘햄릿’ [신시컴퍼니 제공]


단 한 명을 위한 무대 vs 모두를 위한 무대


‘한 명’의 햄릿 vs ‘다수의 배우들’, 유령ㆍ클로디어스ㆍ거트루드ㆍ폴로니어스ㆍ오필리어ㆍ레어티즈 그리고 햄릿.

올 한 해 관객과 만난 두 편의 ‘햄릿’이 무대에 오른 시기는 각기 다르다. ‘겹치기 공연’ 없이 작품마다 ‘킬링 포인트’가 달라 관객들의 관심은 두 편 모두에 향했다.

장장 84일간 관객과 만난 ‘햄릿’(9월 1일 종연ㆍ신시컴퍼니 제작)은 배삼식 작가가 극본을 쓰고, 손진책 연출가가 무대를 진두지휘했다. 현재 공연 중인 ‘햄릿’(11월 17일까지ㆍ예술의전당 제작)은 연극계의 ‘스타 연출가’ 신유청이 극본과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두 ‘햄릿’ 무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배우 라인업’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고전을 재해석하는 각 작품의 방향성이 배우들의 캐스팅에 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연출가의 해석은 무대 디자인의 토대가 됐다.

연극계 거장 배우들이 총출동하고 손진책이 연출을 맡은 ‘햄릿’ [신시컴퍼니 제공]


이태섭 무대미술가는 “연극은 직접적인 예술이자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 현대의 연출가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콘셉트를 세우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명확히 가져야 한다”며 “이러한 연출가의 아이디어와 콘셉트는 무대 디자이너가 뼈대를 세우는 기초가 된다”고 말했다.

신시컴퍼니가 제작한 ‘햄릿’은 대배우의 향연이다. 이호재(83), 전무송(83), 박정자(82), 손숙(80), 김재건(77), 남명렬(65), 박지일(64) 등 무대 경력이 최고 61년에 달하는 한국 연극계의 ‘거장’들이 총출동한 작품이다.

이 무대의 핵심은 ‘연기’다. 말 한 마디 뿐이어도 표정과 자세, 아우라로 무대를 감싸는 거장 배우들의 연기가 주목받을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었다. 초연 당시부터 가져온 ‘연기에 충실하겠다’는 콘셉트가 반영된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연출을 위해선 무대를 비워내야 한다. 때문에 ‘햄릿’의 무대 역시 장식적 요소를 모두 배제했다. 한국 연극의 트렌드를 만들어온 이태섭 무대미술가의 미니멀한 스타일이 그대로 무대에 투영된 것.

텅 빈 무대에선 배우들의 연기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배우들의 ‘햄릿’은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무대로 걸어나와 ‘연기 차력쇼’를 선보인다. 그 어떤 화려한 무대보다 웅장하고 거룩하다.

배우 조승우가 처음으로 연극에 도전한 신유청 극본ㆍ연출의 ‘햄릿’ [예술의전당 제공]


반면 현재 공연 중인 ‘햄릿’은 톱배우 조승우를 중심으로 배우들이 이름을 올렸다. 조승우의 첫 연극 도전작으로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이 작품은 이미 전회차 매진을 기록했다. 모든 배우들에게 언제나 ‘도전적 작품’으로 꼽히는 ‘햄릿’이라는 묵직한 왕관을 쓴 조승우는 무대에서 무수히 많은 대사를 쏟아내며 뒤틀리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간을 연기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무대는 오직 햄릿의 존재를 부각하고 강조하기 위해 설계됐다. 이태섭 무대미술가는 “햄릿을 연기하는 조승우 배우의 움직임을 강조하기 위한 무대로 만들었다”며 “햄릿이 연기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패션쇼의 런웨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계단을 무대 정면으로 뒀다”고 설명했다. 장장 23m에 달하는 깊고 거대한 계단의 벽에서 햄릿이 걸어나오는 장면은 세계를 꿰뚫어 보는 전지전능한 신(神) 같기도, 고별무대를 앞둔 슈퍼스타의 피날레 쇼 같기도 하다. 또 배우가 발산하는 지배적인 에너지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연극계 거장 배우들이 총출동하고 손진책이 연출을 맡은 ‘햄릿’ [신시컴퍼니 제공]


해석의 차이가 만든 무대 미학…‘삶과 죽음’ 거울 vs ‘햄릿을 위한’ 계단


두 ‘햄릿’의 달라진 무대는 관점과 해석의 차이에서 나온다. 앞서 종연한 손진책 연출가의 ‘햄릿’은 ‘죽음의 시(詩)’를 써내려갔다.

이태섭 무대미술가는 “손진책 연출가는 이 작품을 통해 ‘죽음’이라는 인류의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그의 무대 역시 끊임없이 해답을 찾아야 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무대는 거울과 원, 사각형으로만 디자인됐다. 그는 “우주처럼 깜깜한 무대 위에 거울을 두고 그 안에 인간들의 모습을 투영했다”며 “초현실적이면서 추상적인 것이 섞여 있고 평면이 중첩돼 추상성이 강조된 무대”라고 했다.

원과 사각형은 삶과 죽음, 인생을 형상화하고 거울은 극중 인물들을 비추며 그들의 마음과 삶, 시대와 세계를 보여준다. ‘거울’을 무대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로 둔 것은 ‘신의 한 수’였다. 3면의 반투명 격벽으로 둘러싼 무대를 통해 관객은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배우들의 뒷모습까지 보게 된다. 조명을 활용할 땐 반투명 유리의 뒷면을 통해 서로를 엿보고 엿듣는 이들의 음모까지 드러낸다.

연극계 거장 배우들이 총출동하고 손진책이 연출을 맡은 ‘햄릿’ [신시컴퍼니 제공]


거울은 인물은 물론 관객도 투사한다. 철저하게 이분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관객에게도 ‘성찰의 장치’로 활용한다. 죽음이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져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이태섭 무대미술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운 한국의 근원적 정서가 아름다운 시적인 언어와 잘 어우러진 작품”이라며 “이러한 관점을 극대화하고 충실하게 해석한 비주얼로 거울과 우주처럼 까만 무대를 통해 (관객에게) 허무하고 슬픈 정서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경사진 무대’다. 이태섭 무대미술가는 ‘햄릿’의 무대를 사선으로 기울여 ‘오늘의 생’을 살아가는 관객들을 굽어보면서도, 배우들이 서로가 서로를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무대는 연기를 위한 건축이 돼야 한다”는 그의 무대 철학이 담겨서다. 완만한 관객석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무대 전체에 경사를 주고, LED 스크린을 추상적 이미지로만 활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기존의 연극에선 볼 수 없었던 무대 요소다. 무대의 시작과 끝을 수미쌍관으로 연결하는 거대한 원형 무대는 이 작품의 유일한 오브제인 의자로 상징성을 더한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여 앉아 서로의 경계를 넘나든다.

신유청 연출가의 ‘햄릿’ 무대엔 23m의 깊고 넓은 계단이 무대 정면에 자리한다.


신유청 연출가의 ‘햄릿’ 무대는 손진책 연출가의 ‘햄릿’보단 꽉 채워져 있다. 23m의 깊고 넓은 계단이 무대 정면으로 자리한다. 계단의 양옆으로 거대한 벽과 기둥이 웅장하게 서있다. 곧 쓰러질 것처럼 사선으로 기울어진 콘크리트 기둥 하나와 긴 복도는 소실점을 만든다. 계단의 맨 위에서 걸어나오는 햄릿을 ‘패션쇼 피날레’의 주인공처럼 만들기 위한 기법이다.

이태섭 무대미술가에겐 올해의 두 번째 ‘햄릿’이었기에 고심이 더 깊었다. 장장 6개월에 거쳐 작업한 이번 ‘햄릿’의 무대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더해졌다. 계단식 복도와 함께 이중구조의 무대를 조합한 것은 이번 ‘햄릿’의 해석 방향과 맞닿아 있다. 그는 “이 무대는 공간의 입체성보다는 배우의 움직임을 강조하는 건축적 상징성을 부각한다”며 “‘햄릿’의 대사 중 ‘덴마크는 감옥이야. 이 세상이 커다란 감옥이지’라는 ‘햄릿’의 대사를 구현할 수 있도록 비주얼 콘셉트를 잡았다”고 했다. 특히 햄릿이 느끼는 공포를 보여주며 정치극적 느낌을 강조했다. “항상 누군가를 지켜보고 조정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무대 거장의 귀띔이다.

무대 위 길게 쌓은 계단 덕에 관객들은 배우들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 이태섭 무대미술가는 “누군가는 숨어서 다른 인물을 관찰하고, 햄릿은 미친 척하며 주변을 살피고, 소실점 끝에선 허상인지 실상인지 알 수 없는 유령의 존재가 나온다”며 “원작 ‘햄릿’에 가장 가까운 해석을 부각하기 위해 계단과 리프트를 통해 수직으로 들고 나는 무대를 주요 장치로 삼았다”고 했다.

이태섭 무대미술가의 조승우 주연 연극 ‘햄릿’의 무대 스케치 [T Space 제공]


위아래로 들고나는 이중구조의 무대를 통해 연극은 ‘동시상황’을 구현하며 연극성을 살린다. 이태섭 무대미술가는 “현대 관객에게 영화적 느낌으로 다가오게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이 리프트 설비를 갖추고 있어 가능한 시도였다. 이러한 기계 장비는 소음 절감과 시간 계산이 필수다. 지나치게 소음이 많거나 장면전환 시간이 맞지 않으면 연극 감상의 흐름을 깨기 때문이다. 햄릿과 로젠크란츠와 덴스턴의 만남, 오필리어의 절규가 이중구조 무대를 통해 맹활약했다 수차례의 반복과 리허설을 통해 태어난 장면이다.

또 다른 상징은 기둥이다. 쓰러질 듯한 기둥 하나는 무너지는 구질서(덴마크)를 드러낸다. 이 기둥 사이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신질서의 상징인 포틴브라스의 입장은 극적일 수밖에 없다. 기둥과 계단, 거대한 벽면은 질감과 색감까지 무대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이태섭 무대미술가는 자신이 머릿속에서 상상한 텍스처와 색감을 구현하기 위해 각종 시멘트로 적합한 샘플을 만든 뒤, 현장에서 수없이 다듬어갔다. 그는 “무대가 어두운 편이기에 관객들이 볼 때 은은하게 다가올 수 있는 색감으로 정했다”고 했다. 연한 그레이 빛깔의 기둥과 계단은 감옥이 된 햄릿의 왕국을 은유한다.

이태섭 무대미술가가 디자인한 연극 ‘햄릿’의 무대 [T Space 제공]


각기 다른 방식의 무대를 보여준 ‘햄릿’은 하나의 원작을 기반으로 한 만큼 작품이 가진 어두운 분위기와 정서는 닮았다. 두 편 모두 이태섭 무대미술가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공유한다는 것 역시 눈에 띄는 공통점이다. 미니멀한 무대가 두 작품의 해석과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태섭 무대미술가는 “가장 좋은 무대는 조명, 음향, 오브제 등 어떤 요소도 홀로 튀지 않는 무대”라며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없었던 무대를 현대에 와서 시각적인 세련도를 더해 관객에게 조여주는 것은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하지만 현대의 관객에게 이 작품이 가진 소망을 모두 감지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고 에센스만 골라 시적인 그림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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