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맞고 자란 이민자 아이는 나만이 아니었다

유년기 학대로 ‘복합 PTSD’ 앓던 저자
고향동창들 ‘같은 상처’ 알고 치유 공유
‘개인 아닌 디아스포라 집단 문제’ 기술



괴물을 기다리는 사이 스테파니 푸 지음 송섬별 옮김 곰출판


겉으로 보기엔 성공한 아메리칸드림의 표상이다. 그러나 그 속을 보면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며 비명 지르는 사람들. ‘모범적 소수자’로 불리는 많은 아시아계 미국 이민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말레이시아 화교 출신의 이민 2세대 스테파니 푸(작가·라디오PD)의 자전적 에세이 신간 ‘괴물을 기다리는 사이(What my bones know)’는 샌프란시스코 새너제이에 뿌리를 내린 중국·베트남·말레이시아·한국 등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생존기라고 부를 만하다. 작가는 어린 시절 이어진 부모의 신체적 학대와 유기된 경험으로 인해 성인이 된 후에도 갈피를 못잡는 ‘복합 PTSD(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다.

누구나 일상을 살면서 수치스럽고, 후회되고, 화가 나는 경험을 두고두고 떠올린다. 이를 곱씹으며 소위 ‘이불킥’을 하거나 샤워를 하면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신체적 학대와 유기를 당한 복합PTSD 환자는 ‘트리거(Trigger·방아쇠)’가 수백, 수천개다 보니 원인을 무엇 하나로 딱 꼬집어내기도 힘들다. 저자는 깨어 있는 모든 순간 ‘죽고싶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누가 나 좀 구해줘’와 같은 말이 머릿속에 끝없이 재생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다.

살아남기 위해 고통에 무뎌져야 했다.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 죽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수도 없이 곱씹은 탓에 본인이 겪은 학대가 별것 아니었다고 여길 정도로 ‘해리(Dissociation)’ 상태에 치닫는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널 낳은 게 후회된다’며 플라스틱자와 골프채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한 양친이 모두 그를 버리고 딴살림을 차려나갔다. 그는 혼자 빈집에 남아 훔쳐온 냉동음식을 데워먹으며 공부는 물론 교내 신문편집장으로 미친듯이 일에 몰두한다. 그렇게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 진학해 2년반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 졸업한다.

2008년에 닥친 경제위기도 그를 막아서진 못했다. 취업이 안 돼 시작한 팟캐스트가 큰 성공을 거두며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 라디오방송국에 PD로 입성하게 된 것. 아이비리그 출신 동료 사이에서도 커리어 하이를 찍은 10년차 PD였던 그였지만 마침내 무너지고야 만다.

구원자로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기에 그는 과감히 일을 그만둔다. 동료 모두 그를 비웃고 있을 것만 같아 미쳐버릴 것 같은 직장에서 나오는 것이 자신을 위한 첫 번째 치료였다. 닥치는 대로 심리상담사들을 찾아가고 힐링요가도 시도해봤지만 호전되는 듯 느끼는 건 며칠뿐. 그의 내면에 있는 트리거가 당겨지는 순간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결국 그는 어떤 ‘힐링테라피’보다도 원인을 직시하는 것만이 해법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모든 악당의 구원서사는 그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라며 곱씹 듯 말한다.

저자는 우선 고향인 새너제이로 돌아가 동창들을 인터뷰 조사하기로 한다. 그가 졸업한 새너제이의 고교는 15년 전에도 지금도 한 반에 ‘응우옌’(베트남의 대표적 성씨)만 서너명씩 있고 말레이시아, 중국, 한국, 인도 등 아시아인 학생이 95% 이상을 차지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된다. 동창 모두 당시 가정에서 부모의 학대를 받았던 것. 그러나 경찰이 부모를 잡아가면 미국에서 살아갈 방법이 없었기에 어릴 때부터 주입된 ‘효(孝)’라는 강박 때문에 온갖 핍박을 묵묵히 견뎌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아이들에게 지옥을 선사했을까. 그들은 고국에서 정치적 박해와 경제적 궁핍을 피해 미국으로 온 이민 1세대다. 근면성실한 아시아인으로서 죽을 듯 노력해 미국 사회에 동화되려 하지만 마음과 정신 그 어딘가가 부러져버렸다. 그들의 갈 곳 없던 분노와 설움은 가장 약한 존재였던 아이에게 향했다. ‘A’로 도배된 성적표, 아이비리그 진학, 교내 인기 학생으로서 증표를 자랑스레 가져오지 않으면 매타작이 이어졌다.

이 같은 동창들의 고백에 비로소 저자는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이 개인적 트라우마가 아닌 거대 디아스포라 집단의 공통된 기억임을 인지한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요”라고 미리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그 뒤로 이어진 그의 인생사는 전쟁에서 돌아온 ‘상이군인’에 비견할 정도였기에 필요한 한 마디였다. 이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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