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자본적정성 위기 가속화…건전성 지표 악화
‘대출 절벽’ 부추긴 계엄령…가계대출 정상화도 ‘안갯속’
윤석열 대통령이 긴급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계엄군들이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자 철수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
[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지난밤 선포된 비상계엄령 상황이 6시간 만에 마무리됐지만, 한밤의 사태가 금융시장에 미친 악영향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급등한 환율이 쉽사리 안정되지 않으며 시장 불안정성이 확대되는 모양새다. 은행권에서도 원화 가치 하락으로 자본적정성 지표 하락 등 건전성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는 대출 차주 등 소비자들의 실질적인 피해로 이어질 전망이다. 그렇지 않아도 건전성 위기가 가속화하며 대출 제한이 강화되는 상황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신용자·중소기업 등 자금 수혈이 시급한 차주들에 대한 ‘대출 절벽’ 현상이 가속화할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국내 증시 급락 등에 따른 은행 자금 이탈 우려도 더해지고 있다.
13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 임세준 기자 |
4일 금융권에 따르면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서울 외환시장에서 주간거래 종가 기준 1달러당 1402.9원을 기록한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이날 새벽 최고 1446.5원까지 치솟았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있던 2009년 3월 16일(1488원) 이후 15년 8개월여 만에 최고점에 해당한다.
이후 국회가 본회의를 열고 비상계엄령에 대한 해제안을 가결하면서, 환율은 다소 진정됐다. 하지만 비상계엄령이 공식 해제된 후에도 한동안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420원대를 유지하며 전날 대비 1% 이상 상승한 수준을 유지했다.
환율이 요동치면서 은행권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은행들은 최근 환율이 1400원대로 진입하는 등 ‘강달러’ 현상이 이어지면서 자본 건전성 관리에 돌입했다. 원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외화 부채의 원화 환산액이 늘어나며, 보통주자본비율(CET1) 등 자본적정성 비율이 하락하기 때문이다. 통상 원/달러 환율이 10원 증가할 경우 보통주자본비율은 2~3bp(1bp=0.01%)가량 하락한다.
자본적정성 비율이 하락한다는 것은 은행의 자기자본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진다는 얘기로, 은행의 기업가치 평가와 직결된다. 주요 은행들은 최근 기업가치 제고를 통한 주주환원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미 주요 금융지주들도 보통주자본비율(CET1)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달성하는 것을 주주환원 조건으로 내건 상황이다. 자본적정성 관리가 제1순위 과제인 상황에 걸림돌이 생긴 셈이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 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연합] |
문제는 자본적정성 관리를 위해서는 대출을 제한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미 은행들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 대선에 승리하며 ‘강달러’ 현상이 나타나자, 속속 대출 창구를 닫기 시작했다. 가계대출 관리를 위한 주택담보대출 제한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여타 기업대출 등에 대해서도 취급 관리에 돌입한 건 최근의 일이다.
실제 지난 11월 말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기업대출 잔액은 829조5951억원으로 한 달 새 7758억원 줄었다. 지난 10월까지만 해도 매월 평균 6조원이 넘게 늘어나던 기업대출 잔액은 올해 처음으로 감소세를 기록했다. 일부 시중은행들은 자본적정성 관리를 명목으로 기업대출 취급 중단을 결정하기도 했다.
특히 원화 가치 급락으로 인해, 자금 수요가 급한 영세 자영업자나 소상공인, 저소득층에 대한 대출 공급이 우선하여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아 위험가중치가 높게 적용되는 특성 때문이다. 위험가중치가 높은 대출이 늘어날수록, 은행의 자본적정성에는 악영향을 미친다.
서울 중구 명동거리 한 환전소에서 거래되고 있는 환율.[연합] |
상황이 장기화할 경우, 가계대출 정상화에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은행들은 올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시장금리와 무관하게 가계대출 금리를 인상하며, 연말 총량 관리에 돌입했다. 이에 내년 1월부터는 다시 새로운 기준이 적용되며 금리가 내려가고 대출 취급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퍼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적정성 관리를 위한 대출 ‘옥석 가리기’가 시급한 상황에서, 가계대출 공급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한편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자금 이탈’이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지난 10월부터 11월까지 두 달간 5대 은행의 요구불예금 잔액은 15조원 이상 줄었다. 미국 주식과 가상자산 등에 대한 투자 수요가 급속도로 늘어난 영향이다. 향후 원화 가치 하락세가 이어질 경우 이같은 이탈 현상도 가속화될 수 있다. 이를 보완하고 있는 금리 인하 ‘막차’ 예·적금 수요 또한 줄어들 경우, 은행의 자본 여력은 더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은행권도 시장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주요 금융지주는 일제히 임원회의를 소집하는 등 예상 리스크 파악 및 대응 방안 마련에 돌입했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금융시장 불안정성에 대응하고자 회장 주재 임원회의를 소집했다”면서 “당장 위험이 생겼다기보다는 변동성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취지”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