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상승, 외환보유액 급감 우려
당국 “무제한 유동성 공급 통한 총력 대응”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한 4일 새벽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국회 출입을 통제하는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홍태화·정호원 기자] 우리나라의 불안한 정치 상황이 비상계엄이란 돌발 악재로 표출하면서 고환율 우려에 기름을 붓고 있다. 두 번째 트럼프 시대에 북한 리스크에 더해 국내 정국까지 극도로 불안정해지면서 국내 시장의 자금이 유출되고 원화 가치가 거센 하방 압력에 직면하게 되는 모양새다. 이미 환율은 이날 새벽 한 때 1440원대를 뚫었다.
환율이 요동치게 되면 국민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하향 안정됐던 물가는 수입품 가격을 중심으로 뛰게 되고, 고환율을 방어하기 위한 달러 매도 개입이 강해지면서 외환보유액이 크게 줄 수 있다. 수입 기업을 중심으로 한 경영 애로도 예상된다. 이에 금융·외환당국은 무제한 유동성 공급 등 총력 대응에 나섰다.
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 주간 거래 종가(오후 3시 30분 기준) 대비 15.2원 오른 1418.1원으로 개장했다. 전 거래일 야간 거래 기준 종가(새벽 2시 기준)는 주간 거래 종가 대비 22.1원 오른 1425.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환율은 지난 3일 1405.5원에 개장한 뒤 1400원대에서 오르내렸으나, 비상계엄 선포 소식이 전해진 오후 10시 30분부터 빠르게 상승했다.
장중 한 땐 1442.0원까지 급등했다. 미국의 고강도 긴축에 달러가 초강세를 나타냈던 지난 2022년 10월 25일(장 중 고가 1444.2원) 이후 약 2년 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외환시장이 요동치면서 이날 하루 환율의 저점·고점 변동폭은 41.50원에 육박했다.
환율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선거에서 이기면서부터 1400원대를 넘나드는 높은 수준을 이어왔다.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 등 우리나라 고유의 지정학적 리스크도 환율 상방압력을 더했다. 그런데 이번엔 계엄이라는 정치 리스크까지 환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과 계엄은 우리나라가 처한 고유 위험이란 점에서 우려가 크다. 전 세계적 강달러 현상에 더해 추가적인 원화 약세 요인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환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더 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원화와 동조하는 경향이 있는 엔/달러 환율은 최근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기대감에 낮아지는 것과 달리, 원화는 계엄이 만든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옥죄이는 모양새다.
환율이 뛰면 하향 안정되고 있는 물가는 다시 상방 압력을 받는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수입품 가격 전반이 오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12월 이후 고환율로 인한 상방압력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금 유출 가능성도 크다. 특히 불안해진 외국인이 국내 채권시장에서 자금을 빼면서 시장이 요동칠 수 있다.
외환보유액 측면에서도 우려가 앞선다. 빠르게 뛰는 환율을 억제하기 위한 달러 매도 개입이 늘어나면서 외환보유액이 크게 줄 수 있다. 2022년 달러 초강세 시기엔 6개월간 약 330억달러를 시장에 던져야 했다. 이번엔 더 독한 위기가 예정됐다.
외환·금융당국은 이에 비상 회의를 연이어 소집하고 총력 대응 체계를 갖추겠다고 선언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이날 임시 회의를 개최한다. 모든 간부가 참석하는 ‘시장 상황 대응 긴급회의’도 이날 소집됐다.
특히 무제한 유동성을 공급해서라도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은 관계자는 “‘무제한 유동성 공급’이란 건 불안해졌을 때 ‘환매조건부채권(RP)’ 등을 무조건 사줄 수 있다는 매우 강력한 메시지”라며 “오늘 장중이라도 바로 시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위원회는 이날 김병환 금융위원장 주재로 금융상황 점검회의를 개최했다. 금융감독원도 이날 이복현 원장 주재로 긴급금융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비상계엄 선포 이후 나타날 수 있는 금융·외환시장 불안 요인에 필요한 시장안정조치가 즉각 가동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경각심을 갖고 만반의 대응 태세를 갖춰 시장안정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