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재편에 ‘흔들’…“K칩만의 무기 있어야”
정치·지정학적 리스크 확대 속 취약점 여실히
일본 소부장, 네덜란드 EUV 등 원천기술 중요성↑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강화 및 방어수단 절실”
[챗GPT를 이용해 제작] |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K-반도체에는 결정적인 무기가 없어요. 양산 기술은 있는데 원천 기술이 없으니 그걸 가진 국가들이 공급망을 막으면 큰 타격을 입는거죠.”(시스템반도체 관계자)
미국이 대중 수출 규제를 강화하며 한국산 고대역폭메모리(HBM)까지 그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모든 첨단 반도체에는 미국 특허나 소프트웨어 기술이 쓰인다는 점을 무기 삼아 통제하기 시작한 겁니다. 범용 D램 시장 침체 속 ‘실적 효자’로 꼽히던 HBM까지 제동이 걸리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번 이슈가 한국 반도체의 치명적 약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꼬집습니다. 전세계 메모리 최대 생산국이지만, 결국 원천 기술이 없이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특히, 지난 3일 비상 계엄령 사태로 인해 정치외교적 동력이 상실되며 반도체 업계의 글로벌 경쟁력은 더욱 취약해질 전망입니다. 오늘 칩만사에서는 HBM 수출 통제 사건으로 인해 드러난 ‘K-반도체’의 민낯을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상무부는 2일(현지시간) 대중 첨단 반도체 및 장비 수출 규제 대상을 확대한다며, HBM도 이에 포함된다고 밝혔습니다. HBM은 여러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량을 극대화한 고성능 메모리로, AI 가속기에 필수적으로 탑재됩니다. 미국은 HBM의 성능 단위인 ‘메모리 대역폭 밀도’(memory bandwidth density)가 평방밀리미터당 초당 2기가바이트(GB)보다 높은 제품을 통제하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이 생산 중인 모든 HBM이 해당됩니다. 이에 따라 당장 오는 31일부터 한국산 HBM의 중국 수출이 어려워질 전망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
미국에서 생산되거나 미국 기업이 생산하지 않는, 한국 토종 HBM에 미국 정부가 수출 통제를 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미국의 소프트웨어 및 특허 기술력 때문입니다.
HBM을 포함한 모든 첨단 반도체에는 설계자동화(EDA) 툴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쓰입니다. EDA는 복잡하고 다양한 반도체 회로의 설계를 돕는 자동화 기술입니다. 건축 설계도를 그릴 때 손이 아닌 컴퓨터 지원 설계(CAD)를 쓰는 것과 유사한거죠. EDA 없이는 첨단 반도체 설계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메모리 기업 뿐 아니라 글로벌 주요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들 전부 EDA 솔루션을 활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시장을 미국이 꽉 잡고 있다는 겁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전체 EDA 시장 점유율은 미국 시높시스 32%, 미국 케이던스 30%, 독일 지멘스EDA 13% 순으로 집계됩니다. 전체 시장의 60% 이상을 미국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EDA 장악력을 무기 삼아 “다른 나라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더라도 미국 특허나 소프트웨어, 기술 등이 사용됐다면 수출통제를 준수해야 한다”는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Foreign Direct Product Rules)’를 적용했습니다. 때문에 한국산 HBM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죠.
국내 시스템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만약 미국이 내일부터 ‘우리 EDA나 IP(지적재산) 쓰면 안돼’라고 막는다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당장 문 닫아야하는 수준”이라며 “미국이 가진 반도체 업계에서의 영향력은 어마무시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미국의 HBM 수출 통제로 중국에 HBM 물량 일부를 수출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매출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ASML의 EUV 장비 [로이터] |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한국 반도체 업계가 원천기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최근 격화되는 반도체 공급망 재편 속 대외 불안정성과 리스크에서 우리를 방어할 ‘대체 불가능한 무기’가 없는 건 치명적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반도체 업계 전문가는 “한국은 메모리 제조 1위 국가지만, 세계 각국의 원천 기술을 받아다가 양산하는 ‘맨끝단’에 있는 역할”이라며 “소재나 부품, 장비 등 주요 공급망 분야에서 우위를 갖고 있는 국가들이 기술을 안 준다면 오롯이 영향을 다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례로 일본은 소재와 부품에서 원천 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국 안보신기술센터(CSET)에 따르면 일본이 반도체 소재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56%로 전세계 1위입니다. 특히, 반도체 노광장비에 쓰는 포토레지스트 시장의 90% 이상을 전부 일본 기업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웨이퍼의 불순물을 씻어내는 고순도불화수소 시장 점유율도 70%에 달합니다.
네덜란드의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7나노 이하 기반의 반도체는 네덜란드 ASML의 장비 없이는 만들 수 없습니다. 때문에 ASML은 반도체 업계의 ‘슈퍼 을’로 불립니다.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 [리벨리온 제공] |
업계에서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국만이 보유할 수 있는 원천기술 육성하고,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진행 중입니다.
지난 2일 토종 AI 반도체 기업 리벨리온과 사피온코리아의 합병 절차가 완료되면서 국내 첫 AI 반도체 ‘유니콘’ 기업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리벨리온이라는 사명으로 출범했는데, 그 기업 가치는 1조3000억원으로 평가됩니다. AI 인프라가 경제 안보와 직결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인력, 자원, 파트너십 면에서 본격적인 글로벌 경쟁이 가능한 규모의 AI 반도체 기업 탄생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간 리벨리온을 이끌어온 박성현 최고경영자(CEO)가 단독 대표를 맡습니다. 기존 사피온 주주였던 SK텔레콤과 SK하이닉스가 리벨리온의 성장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SKT와 AI데이터센터 분야 글로벌 진출을 위해 힘을 모으는 동시에,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 일본 등 해외 시장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준다는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