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의 무대 복귀 안은진…전회차 매진
배우 안은진이 9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국립극단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투표권 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19세기 초, 우주를 올려다본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은 망원경을 사용할 수 없어 육안으로 사진건판에 찍힌 관측 자료를 분석하는 ‘하버드 컴퓨터(계산원)’로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은하를 탐구했던 이들. 여성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1868~1921)은 그 중 한 명이었다.
은하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표준광원법’ 개발에 이바지하고, ‘허블의 법칙’을 입증하는 토대를 마련한 주인공. 시대, 여성, 천문학의 거대한 벽을 두드려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은 레빗의 삶이 무대로 옮겨왔다.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12월 28일까지·명동예술극장)이다.
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안은진은 한창 공연 중인 명동예술극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무대에 서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에 대본을 받고 1년 동안 이 시간을 기다려왔다”며 “첫 공연이 올라가기 전엔 떨렸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가니 ‘아, 이게 무대의 맛이었지’ 하며 무대에서 진하고 재미있게 노는 중”이라고 말했다.
미국 극작가 로렌스 군더슨이 쓴 ‘사일런트 스카이’는 김민정 연출가가 직접 윤색해 한국 무대에 올리는 초연작이다. 헨리에타 레빗의 인생과 19세기 억압의 시대를 살던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묵묵히 일궈나간 모습을 무대로 옮겼다.
김민정 연출가는 “천문학 이야기이기도 하고 역사이기도 하며, 과학과 아름다움을 함께 담고 있는 자작품”이라며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이 안에 담긴 문장들을 잘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윤색 과정에서 집중한 것은 원전 텍스트에 없는 장면들을 잘 정돈된 말로 잘 전달하는 것이었다. 김 연출가는 “일반 관객에겐 어려울 수 있는 천문학이라는 장르를 풀어내는 과정이 있었다”며 “윤색자로서 아름다운 문장을 접할 수 있어 기뻤고, 연출로서는 인간과 우주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감격이었다”고 말했다.
연극엔 2017년 ‘유도소년’ 이후 7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안은진을 비롯해 레빗의 동생이자 작곡가를 꿈꾸는 마거릿 레빗의 홍서영, 광도 측정가 윌러미나 플레밍 역의 박지아, 항상 분류법의 기준을 마련한 애니 캐넌 역의 조승연, 하버드대학 천문대장의 제작 피터 쇼 역의 배우 정환이 함께 한다.
안은진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로 김민정 연출가를 꼽기도 했다. 그는 2012년 김민정 연출의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데뷔했다.
9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국립극단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안은진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 |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만큼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안은진은 “무대에선 표정과 말이 주는 힘 외에 몸이 주는 에너지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감각을 다시 빨리 찾아올 수 있을지 걱정됐다”며 “좋아하는 (전)미도 언니에게 전화를 하니 굉장히 좋은 솔루션을 줬다”고 귀띔했다. 안은진과 전미도는 ‘슬기로운 의사생활’(tvN)에서 호흡을 맞췄다.
안은진이 바라본 ‘사일런트 스카이’는 “남녀노소 모두가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는 “한 시대의 여성이 겪는 상황들도 있지만, 이 작품을 한 사람의 일대기로 읽었다”며 “함께 연대하는 사람들을 통해 힘을 얻는 이야기가 무척 좋았다. 그 부분을 전달하기 위해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특히 안은진은 “우주 이야기, 하늘과 별의 이야기를 아는 것이 더 중요했다”며 “공부를 하다 보니 과학이 전해주는 위로가 좋았다. 과학적 사고로 전하는 위로가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한 인물의 연대기이자 특정 시대를 담고 있으면서도 연극은 광활한 우주의 신비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김 연출가는 “천문학은 감각적인 분야로 과학적, 수학적인 접근도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감각의 장르였다”며 “장면을 만들 때 시각, 청각 등 다양한 감각을 활용해 우주를 펼쳐내고, 그 순간 관객들이 ‘우와’하는 반응을 자연스럽게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희 프로덕션 전체의 목표였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 계엄’ 사태 이후 후폭풍으로 불안정해진 때에도 극장은 멈추지 않는다. 김 연출가는 “격변기인 20세기 초라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사는 우리가 배우는 것들이 명확히 있다”고 말했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저마다 다른 길을 가더도 당신의 삶은 여전히 의미있고 괜찮다고 격려해주는 것,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 누군가 나를 지지한다는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이 무대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연에서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처럼 미래의 누군가에게도 우리의 현재 선택들이 위로와 지지, 그리고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김민정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