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대통령 탄핵 표결 무산에 불확실성 고조
“상단 1500원대까지 열어둬야” 목소리도
금융당국, 금융사 연이어 만나 대응책 논의
10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6.1원 내린 1430.9원에 개장했다. [연합] |
[헤럴드경제=김은희·김벼리·유혜림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촉발된 정치적 혼란으로 원화 가치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개장가 기준 일주일 만에 25.4원 올랐고 장중 1440원대에 바짝 다가섰다. 2년 1개월여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이 무산되면서 정치 불안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시장에는 ‘1500원대 환율 시대’가 열릴지 모른다는 공포감까지 드리우는 모양새다.
1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 종가보다 6.1원 내린 1430.9원으로 개장했다. 이는 개장가 기준으로 2022년 11월 1일 1428.5원 이후 가장 높은 수치로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난 3일 개장가(1405.5원)와 비교해도 1.8% 올랐다.
윤 대통령이 3일 밤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야간 거래 기준 1446.5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여전히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윤 대통령 탄핵안 폐기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지난주 장중 1420원대 수준이었던 환율은 지난 9일 주간 거래 종가가 1437.0원을 기록하며 1440원 턱밑까지 올랐다.
여당이 탄핵 반대 의견을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 야당은 탄핵이 가결될 때까지 매주 탄핵안을 상정하겠다고 예고하고 있어 정치적 불확실성에 따른 외환시장 변동성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실제 금융권에서는 연말까지 원/달러 환율이 최고 1460원대로 올라설 것으로 관측하는 분위기다.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원화 약세 압력이 높아질 수 있는 만큼 원/달러 환율 상단을 1500원대까지 열어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당선에 이어 국내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원/달러 환율의 상방 위험이 한 단계 높아질 소지가 있다”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던 2016년 12월과 비슷한 분위기로 이어질 여지가 있어 이 경우 당초 전망했던 환율 상단인 1450원선에 대한 안정성도 담보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백 이코노미스트는 그러면서 과거 대통령 탄핵 국면 시 환율이 3~5% 상승 전개된 만큼 보수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 전날인 2017년 12월 2일부터 헌법재판소의 인용이 이뤄진 이듬해 3월 10일까지 3개월여간 원/달러 환율은 1131.0원에서 1208.5원까지 80원 가까이 널뛰었다.
오재영 KB증권 연구원은 “단기적으로 1450선 상단을 지킬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정국 수습이 길어지고 내년 초 다시 ‘트럼프 리스크’가 재부각되면 외환시장은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달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뒤 보편관세 도입 등이 본격화되면 강(强)달러 흐름이 굳어지며 원화 가치 절하가 심화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환율이 크게 뛰면 금융사의 유동성과 건전성에도 경고등이 켜질 수 있다. 일단 기업의 매입 외환(해외에서 받을 외화를 은행으로부터 선할인해 받는 여신) 물량이 늘어나고 대기업을 중심으로 외화 예금을 빼내면서 외화 유동성이 부족해질 수 있다. 고환율 영향으로 기업의 자금 조달이나 수익성에 문제가 생기면 이들에 대출해 준 금융사의 건전성에도 부담이 된다.
또한 외화 표시 자산이나 해외 출자금에서 신용위험가중자산(RWA) 등이 늘어 금융그룹 전체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업계는 환율이 10원 오를 때 주요 금융지주의 자기자본비율이 약 0.01~0.02%포인트 낮아지는 것으로 추정한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외국인 투자자가 국내 금융업종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고 있다는 점도 금융권의 불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외국인 투자자는 지난 4~6일 사흘간 금융업종에서 7096억원 순매도했다.
전문가들은 향후 2주간 정치적 상황이 환율 1500원 선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봤다. 최진호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시장 심리가 불안정해진 상태”라며 “1~2주 안에 흘러가는 정치적 상황에 신용평가사들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했다.
금융당국은 환율 흐름을 면밀히 모니터링하며 변동성 완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 나가겠다는 방침이다. 이날 오전 긴급 개최된 거시경제금융현안간담회(F4회의)에서도 외환시장 변동성 대응에 대해 긴밀하게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당국은 필요 시 외화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등을 통해 외화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하고 외환 유입을 촉진하기 위한 구조적 외환 수급 개선방안도 이달 중 발표할 계획이다.
금융당국이 금융사와 연이어 만나 시장 안정화 방안에 대해 의견을 모으고 있는 것도 같은 차원이다.
금융위원회는 이날 권대영 사무처장 주재로 5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농협)와 비금융지주계열 증권사, 카드사, 보험사 등 최고재무책임자(CFO)와 함께 시장점검회의를 연다. 이는 전날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연 금융상황 점검회의 연장선으로 각사 재무를 총괄하는 CFO와 현 시장 상황에 대한 인식과 대응방향을 논의하는 차원에서 마련된 자리다.
앞서 지난 9일 김 위원장은 5대 금융지주 회장을 불러 원/달러 환율 급등에 따른 은행의 건전성, 유동성, 재무적 안정성 영향 등을 점검하며 금융 자회사의 유동성과 건전성을 면밀히 점검해줄 것을 주문한 바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회의에서 “최근 국내 정치 상황으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으니 금융 안정과 신뢰 회복에 총력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하며 특히 환율 상승과 관련해 자본비율 영향을 세밀하게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