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직후 3거래일간 外人 코스피서 1.2조 순매도
“원/달러 환율, 1440~1450원 저항선…外人 자금 유출 요인 될 수도”
단기간 하락 반전 쉽지 않은 환율…“신속한 민주주의 회복 중요”
[게티이미지뱅크] |
[헤렬드경제=신동윤 기자]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원화(貨) 가치가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주요 20개국(G20) 회원국 등 글로벌 주요국들이 사용 중인 통화 가치와 비교했을 때 사실상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상황에 놓이면서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등장으로 인한 ‘킹(King) 달러’ 현상이 대외적 배경으로 깔린 상황에서, 비상계엄 사태와 이어진 탄핵 정국 장기화에 대한 우려란 대내적 문제까지 불거지며 원화 가치는 세계 주요 통화들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속도로 추락 중인 상황이다.
이런 환경 탓에 국내 증시 ‘큰손’으로 불리는 외국인 투자자가 올해 하반기부터 보여주고 있는 ‘국장 탈출’ 속도를 더 높일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10일 헤럴드경제는 이날 오전 6시 기준으로 인베스팅닷컴 자료를 활용해 38개 OECD 회원국 중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이 사용하는 20개 통화의 트럼프 미 대선 승리(11월 5일) 이후 달러 대비 가치 절상·절하율을 분석했다.
이 기간 달러 대비 원화 가치 절하율은 4.37%로, 총 20개 통화 중 가장 큰 폭으로 가치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G20 회원국이 활용 중인 16개 통화 가치에 대해 살펴봐도 원화 가치는 상대적으로 큰 폭으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원화보다 더 큰 폭으로 가치가 떨어진 통화는 브라질 헤알화(-5.80%)뿐이었다.
시점을 나눠서 봤을 때 원/달러 환율은 트럼프 당선인의 대선 승리 이후 지난 3일까지 한 달 남짓의 기간 2.73%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당선인의 재등장으로 전 세계적으로 ‘강(强) 달러’ 현상이 나타난 데다, ▷보편 관세 및 대(對)중국 고율 관세 ▷반도체·2차전지 보조금 폐지·축소 등 트럼프 새 행정부가 내세운 경제 정책이 국내 주요 산업 섹터에 직격탄을 날릴 것이란 우려가 커진 결과로 분석된다.
이러던 가운데 지난 3일 급작스럽게 발생한 윤석열 대통령에 의한 ‘비상계엄 사태’는 원화 약세 현상에 ‘치명타’를 날린 모양새다. 비상계엄령 발표 후 탄핵 정국으로 이어진 불과 4영업일 만에 원화 가치가 1.59%나 추가 절하되면서다.
이재원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정치 리스크로 인해 원/달러 환율은 (9일) 장중 1430원대에 도달했다”면서 “코스피 2200포인트가 붕괴했던 지난 2022년 10월 이후 최고치”라고 짚었다.
이주원 대신증권 연구원은 “프랑스 내각 총사퇴 결정 등 정치적 이슈에도 불구하고 달러인덱스 상승은 크지 않은 상황에서 원/달러 환율은 국내 정치 불안 요인으로 급등세를 기록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정치 불확실성이 남은 만큼 당분간 원/달러 환율 상단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내다봤다.
일반적으로 외국인 투자자에게 원/달러 환율 상승은 ‘환차손’ 발생으로 인해 국내 증시에 대한 투자 매력도를 떨어뜨린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외국인 투자자는 트럼프 당선 이후 지난 9일 종가까지 코스피 시장에서만 4조9525억원 규모의 순매도세를 보였다. 비상계엄 사태 발생 후 3거래일(4~6일)간 사흘 연속 코스피 시장에서 순매도세를 보인 외국인 투자자가 국내 증시에서 뺀 투자금의 규모는 1조2419억원에 달한다.
국내 증시 전문가들은 지난 7월 이후 국내 증시에서 순매도세로 돌아선 외국인 투자자들의 ‘코리아 엑소더스(대탈출)’ 현상의 강도가 원/달러 환율 상승 추세로 인해 더 세질 지 주목하고 있다.
이상범 KB증권 연구원은 “과거에도 굵직한 정치적 이벤트가 발생할 경우 3~6개월간 사태가 지속됐다”면서 “(원/달러 환율) 1440~1450원 내외가 강력한 저항 레벨로 형성됐다. 사태가 빠르게 수습될 기대가 낮아지고 있는 만큼 1390~1450원 내에서 원/달러 환율이 레벨을 높여갈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정치적 리스크가 직접적으로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단기적이고 환율에도 중장기적 영향은 제한적이나, 외국인 자금 이탈 등 유동성 움직임을 통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트럼프 발 국장 투자 심리 위축으로 외국인 자금 이탈이 지속되고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에서 고착된 현 상황에서는 더더욱 정치적 리스크가 두드러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코스피와 코스닥이 급락한 9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 종가가 표시돼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코스피 종가는 전 거래일 대비 67.58포인트(2.78%) 내린 2,360.58, 코스닥 지수는 전장 대비 34.32포인트(5.19%) 내린 627.01로 마감했다. [연합] |
외국인 투자자들은 올해 상반기(1~6월) 고(高)금리·강달러란 비우호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코스피에 대해 글로벌 인공지능(AI) 랠리 등의 분위기에 힘입어 ‘역대 최대’ 수준인 22조7981억원 규모의 순매수세를 보인 바 있다. 하지만, 하반기(7~12월) 들어선 17조5606억원 규모의 순매도세를 보이며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이는 반기 기준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가 발생했던 지난 2020년 상반기(21조4566억원) 이후 9개 반기 만에 기록한 최대 순매도액이다.
이날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4년 11월 외국인 증권투자 동향’에 따르면 외국인은 지난달 국내 상장주식 4조1540억원을 순매도했다. 외국인들의 주식시장 순매도는 지난달까지 4개월째다.
한 외국계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의 출범에 따른 관세, 무역 분쟁, 보조금 축소 등 경제·통상 충격의 우려 탓에 국내 대표 산업군인 반도체, 자동차, 2차전지 관련주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의 이탈 행렬이 이미 강력한 수준”이라며 “한국 경제가 향후 탄탄한 성장률을 기록하지 못하고 침체 국면에 빠지는 등 중장기적으로 국내 증시에 베팅한 외국인 투자자의 수익을 보장할 수 없다면 강달러 발 외국인 자금 이탈 충격은 더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지난 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부쳐졌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투표 불성립’이란 이유로 본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점이 외국인 투자자의 투심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 탄력성을 믿었던 외국인으로선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국내 증시에 환차손을 감수하면서까지 베팅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순매도 압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이 무산된 뒤 탄핵 촉구 및 국민의힘을 규탄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한 외국계 투자회사 관계자는 “현재 글로벌 투자사들은 내년도 신흥시장(EM)에 대한 투자 계획을 세우는 단계”라면서 “예상보다 더 낮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다는 평가 속에,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한 한국 대신 상대적으로 더 높은 수익성을 기록하면서도 펀더멘털이 더 견조한 인도, 대만 등 다른 EM의 투자 비중을 높여야 할 지 여부를 저울질 중”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원/달러 환율의 하락 반전을 단시일 내 기대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주원 연구원은 “12월 원/달러 환율 하락이 가능한 변수로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완화적 기조 ▷중국 중앙경제공작회의 부양 기대감 유입으로 위안화 강세 연동 등이 꼽혀왔다”면서 “현재 상황에선 이런 변수들이 모두 나타나더라도 대내적인 불안 탓에 원/달러 환율 하락 폭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 대한 투자 심리가 훼손된 가운데 중국의 부양기대감이 재차 형성될 경우 오히려 국내 증시에서 이탈한 외국인 자본이 중국 시장으로 유입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에 중장기적으로 큰 충격을 주지 않고, 해외 투자자들이 급격히 한국 시장에서 등을 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단기 수습’을 꼽는다. 정치적 갈등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조기에 수습하고, 해외 투자자들에게 밸류업(기업가치 제고)이나 각종 구조개혁 등 한국 경제에 매력을 더하는 정책들이 일관되게 추진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우 노무라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정부는 최대한 많은 해외투자자와 만나 적극적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다”며 “무엇보다 여러 한국 정부의 경제 정책이 정권 등이 바뀔 때마다 사라지지 않고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추진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