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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 묵서가 쓰인 백자. [국립경주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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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졔쥬’ 묵서가 쓰인 백자. [국립경주박물관]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용왕(龍王)’, ‘기계요(杞溪窯)’, ‘기(器)’, ‘개석(介石)’, ‘십(十)’, ‘졔쥬’, ‘산디’….
‘안압지(기러기와 오리 무리가 있는 연못)’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 수도 있는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조선백자에 먹물로 쓴 이같은 글씨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무엇보다 ‘용왕’ 글자가 눈길을 끄는데, 이를 근거로 학계는 최소한 16세기 조선시대까지는 월지가 용왕 관련 제사나 의례가 치러진 공간이라고 보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50여년 전 발굴한 사적 ‘경주 동궁과 월지’ 8000여점의 출토품 가운데 조선시대 자기 조각 130여 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먹물로 쓴 글씨를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박물관은 ‘용왕’ 글자를 발견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신라가 멸망한 뒤 월지 일대가 폐허처럼 변하면서, 그간 월지의 용왕 제사도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현태 학예연구사는 “적어도 16세기까지는 월지가 용왕과 관련한 제사나 의례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이 분명해졌다”며 “제사의 주재자를 뜻하는 ‘졔쥬’라는 한글 묵서가 확인된 점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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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주 동궁과 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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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요’ 묵서가 쓰인 백자. [국립경주박물관] |
16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백자 가운데 ‘용왕’이라는 글자가 적힌 조각은 여러 점 확인됐다. 글자는 대부분 밑바닥에 붙은 굽 부분에 적혀 있었다. 1145년 편찬된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용왕전’(龍王典)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월지에서 용왕 제사를 거행할 때 각종 의례를 관장하는 관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복수의 조선백자 굽에서 ‘기계요’, ‘기’, ‘십’, ‘개석’ 등 묵서도 확인됐다. 기계요는 오늘날 포항시 기계면 일대의 가마에서 생산된 자기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 자만 쓰인 글자는 기계요의 줄임말로 보인다. 십 자는 서울 종로구 청진지구 유적을 비롯한 한양도성과 경주 재매정지에서 출토된 조선백자의 굽에서도 확인됐는데, 숫자가 아니라 부호였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돌보다 단단해 절개를 굳게 지킨다는 의미가 담긴 ‘개석’은 백자의 소유자 등을 구분하기 위한 사람의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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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간’ 묵서가 쓰인 백자. 오른쪽 사진은 X선 촬영 사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자를 새긴 것이 확인된다. [국립경주박물관] |
아울러 통일신라시대 월지 주변 건물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금속 장식에서도 글자가 확인됐다. 문의 모서리 부분을 마감한 띠쇠로 추정되는 금속 장식에는 서체가 다른 ‘내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내간은 통일신라시대에 왕실과 궁궐의 사무를 관장한 내성의 관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물관은 처마 서까래 또는 난간의 마구리 장식으로 추정되는 금동 판에 새겨진 ‘의일사지(義壹舍知)’ 글자도 확인했다. 사지는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13관등으로, ‘의일’은 사람의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사람 이름으로 본다면 동궁과 월지의 창건이나 중수 시 공사에 직접 관여한 관리 인명이 확인된 첫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박물관은 지난해부터 월지 관련 유물을 재정리하고 조사하는 ‘월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1974년부터 2년간 월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쏟아진 토기와 기와, 금속공예품, 불상, 목간(木簡) 등 3만3292점에 달하는 유물의 미스터리를 푸는 작업이다. 당시 발견한 유물의 양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장에 선보인 1200여 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수장고에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