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정경화가 선택한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빈 [롯데문화재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013년 5월, 봄꽃이 만개한 어린이날이었다. 열세 살의 ‘꼬마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빈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야외 음악회의 협연자로 무대에 섰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의 선택을 받으면서다.
“굉장히 귀여워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리허설 땐 장난도 많이 쳐주셨고요. 하지만 매순간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진지했어요. 그 깊이 있는 과정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저도 이전과는 다른 집중력이 생겼고, 음악을 마주하는 자세를 배우게 됐어요.”
11년이 지나 20대에 접어든 이수빈(24)이 다시 한 번 정명훈의 선택을 받았다. 정명훈(71)이 2017년 창단한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서다. ‘음악을 통해 하나되는 대한민국’을 기치로 창단한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는 국내 교향악단 전ㆍ현직 단원과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출신 연주자들이 모인다. 업계 관계자는 “정명훈 지휘자와 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이기에 국내외 유수 악단과 솔리스트들이 자발적으로 앞다퉈 참여한다”고 귀띔했다.
일 년에 딱 한 번, 매해 연말에 열리는 공연에선 앞서 피아니스트 조성진(2017), 임윤찬(2022) 등이 협연자로 함께 했다. 이수빈은 이번 무대에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의 전 악장을 들려준다. 11년 전엔 3악장만 연주했던 그 곡이다.
그는 최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를 통해 “어릴 땐 정명훈 선생님과의 만남이 마냥 설레고 신이 났는데, 지금은 그 때와는 또 다른 설렘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바이올리니스트에겐 ‘꿈의 협주곡”이라는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는 점도 각별하다. 이 곡은 이수빈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리마다 연주했다. 2014년 영차이콥스키 콩쿠르 2위에 올랐을 때, 지난해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3위를 했을 때 연주한 곡도 이 작품이다.
그는 “연주할 때마다 흥분되고 만족감을 주는 곡”이라며 “좋은 영감을 주는 뛰어난 레코딩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에게 설득력 있는 해석의 차이콥스키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꼽는 최고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는 1973년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1914~2005)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과 정경화의 협연 녹음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빈 [롯데문화재단 제공] |
이른 나이에 유명세를 탄 만큼 이수빈을 수식하는 표현들도 많다. 정명훈의 선택과 함께 2013년 모스크바 오이스트라흐 국제 바이올린콩쿠르 주니어 부문에서 우승했을 땐 ‘한국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영재’로 불리다 지금은 ‘제2의 정경화’로 불린다. 이수빈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사람 역시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2010년경이었다.
“정경화 선생님은 제게 멘토같은 분이에요. 연주자로서 가지는 질문과 고민을 누구보다 먼저 선생님과 나눠요. 선생님께선 늘 자신의 일처럼 상담해주시고요. 칭찬을 후하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시지만, ‘넌 특별한 아이’라고 해주신 말씀이 길잡이가 돼요. 오늘도 한 시간 전에 문자 주셨어요. (웃음)”
4남매 중 막내이자 늦둥이인 이수빈은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언니는 각각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오빠는 첼로를 한다. 어릴 땐 연습을 한 순간도 멈추는 것을 싫어 늘 바이올린과 한 몸처럼 지냈다.
그는 “연주자는 90%는 혼자이기에 고독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고, 평소와 다름 없이 하루의 루틴을 유지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것을 뼛 속 깊이 느낀다”고 했다. 별 것 아닌 일상의 루틴과 꾸준한 연습을 지켜나가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쓰고 연습을 한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잠들기 전 쓰는 일기는 이수빈의 연습 기록과도 같다. 그는 “그날의 기억과 연습하면서 느낀 그 순간의 느낌과 생각들을 적고 있다”고 했다.
매일 밤 적어내려가는 일기처럼 이수빈은 누군가의 삶 안에서 “꾸준히 기억되는 연주자”를 꿈꾼다.
“유명하고 성공한 연주자는 많지만, 누군가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 연주자는 많지 않아요. 어떤 한 사람에게 연주만으로 특별한 기억을 심어준다는 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뜻깊은 일이더라고요. 하나의 음악은 작곡가들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들의 삶을 들려주는 전달자로서 책임감, 사람들에게 특별한 기억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