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국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나라다.”(1998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부 장관)
결국 여론조사와 각종 논평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국 대선은 박빙의 승부와 거리가 멀었다. 11월 5일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두 번째 임기를 확정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비록 표 차이가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결과를 뒤집기에 충분히 결정적이었다. 선거 이후 몇 주 동안 카멀라 해리스와 민주당의 패배 원인을 분석하는 다양한 논평이 이어졌다.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코로나19 이후 급격한 물가 상승과 조 바이든 대통령 임기 후반에 급증한 이민 문제가 유권자들의 반발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선진국 선거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흐름과도 일맥상통한다.
미국은 여전히 정당 간 갈등이 극심한 상황이다. 특히 첫 임기 중 두 차례 탄핵을 겪었던 이례적이고 논란이 많은 지도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정치적 분열이 더욱 두드러졌다. 동시에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함에 따라 트럼프는 최소 향후 2년간 정책 방향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확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초기 인사와 정책 발표는 그의 두 번째 임기가 이전보다 더욱 예측하기 어렵고 혼란스럽게 진행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캐나다, 멕시코, 중국에 대한 ‘첫날’ 관세 인상과 브릭스(BRICS) 국가들에 대한 100% 관세 부과 위협은 그의 정책이 개인적 성향을 강하게 반영하며 논란의 중심에 설 가능성을 보여준다.
에너지, 기후 변화, 이민 정책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와 뚜렷하게 다른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적대국뿐 아니라 동맹국과의 관계에서도 더욱 대립적인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바이든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한 미국의 강경한 태도는 초당적인 지지를 받으며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미국이 ‘미국 우선’ 정책을 중심으로 자국 내 문제에 집중하면서 국제 경제, 정치, 규제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에서 계속해서 물러날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과 역동적인 국내 경제, 첨단 기술 개발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20년 전과 비교하면 자신감은 약화됐으며, 국수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요약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기간과 달리, 미국은 국제 관계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겠지만, 더 이상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이후 미국은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에서 점차 물러섰다. 특히 국제 무역 분야에서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마이클 비먼은 최근 저서 ‘워킹 아웃(Walking Out)’에서 이 점을 자세히 분석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시작된 이러한 흐름은 바이든 행정부까지 이어졌으며, 미국은 무역 자유화를 확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세계무역기구( WTO) 무역 체제의 핵심 원칙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트럼프 행정부는 WTO 회원국 모두에 동일한 관세율을 적용하는 최혜국 대우(MFN) 원칙을 폐기했다. 대신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수입되는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했으며, 중국산 제품에는 훨씬 더 높은 관세를 매겼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무역과는 무관한 다양한 이유로 특정 국가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위협하기도 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 도입된 대부분의 관세 정책을 유지했다. 더불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Chips Act)과 같은 주요 산업 정책을 통해 (관세 납부 후) 수입품을 국내 생산품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WTO의 내국민대우 원칙을 사실상 무시하는 행보를 보였다.
트럼프와 바이든 행정부 모두 WTO 상소기구의 구성원을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WTO의 분쟁 해결 메커니즘을 사실상 무력화했다. 이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가 WTO 판결을 준수할 의무에서 사실상 자유로워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최혜국 대우(MFN), 내국민 대우, 그리고 WTO 의무적 분쟁 해결 메커니즘은 전후 무역 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어 미국이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핵심 원칙이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이러한 원칙을 외면하며 정책 방향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존 협정 개정을 제외하면 새로운 무역 협상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며, 트럼프 행정부 시절 서비스 무역 협정(TISA) 협상에서도 미국은 발을 뺐다.
미국의 참여 부족으로 인해 WTO 회원국 간 무역 협상이 지연됐지만, 완전히 중단되지는 않았다. 미국이 TPP에서 탈퇴한 후 일본은 이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CPTPP)으로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영국의 합류로 최근 발효됐다. 한편,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참여하는 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RCEP)은 기준이 낮다는 비판에도 무역 확대에서 예상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EU는 최근 브라질, 아르헨티나 및 기타 메르코수르 국가와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또 다른 주요 무역 주체인 한국은 최근 걸프협력회의(GCC)와 무역 협정을 체결했으며, 말레이시아와의 업그레이드 협정은 내년 서명을 목표로 막바지 협상이 진행 중이다.
미국의 참여나 전폭적인 지지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다자간 협상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전자상거래에 관한 국제 협정은 미국이 서명을 거부했음에도 80개국이 체결했다. 또한, 미국이 WTO 상소기구 구성원 임명을 가로막은 이후, 캐나다의 오타와그룹과 다른 국가들은 구속력을 갖는 임시 분쟁 해결 메커니즘에 합의했으며, 현재까지 27개국이 이에 서명했다.
미국의 국제적 역할 축소로 가장 큰 혜택을 얻은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은 국제 기구, 협상, 그리고 기준 설정 과정에서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일대일로(BRI) 프로젝트, BRICS 그룹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 왔으며,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국제민간항공기구 (ICAO) 같은 국제 기구의 고위직에 자국 인사를 배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미국이 국제 기후 협상에서 일관된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사이, 중국은 이를 기회로 삼아 바쿠에서 열린 COP29 협상에 약 1000명의 대표단을 파견하며 영향력을 대폭 강화했다.
물론 미국의 리더십이나 참여 없이 국제 합의를 이루는 데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과 이를 대체하기 어려운 공백이다. 국제 사회가 오랜 기간 미국을 중심으로 조율하며 합의를 도출해 온 관행도 다른 국가들이 이를 대신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여기에 더해 유럽, 일본, 캐나다 정부의 상대적 약세와 중국의 경제적 어려움 또한 이들 국가가 글로벌 리더십을 맡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미국의 리더십 공백은 다른 국가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수도 있다. 특히 신기술 분야에서는 규제의 필요성이 시급하며, 산업계에서도 안정적이고 일관된 운영 규칙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만약 충분한 글로벌 영향력을 가진 국가나 지역이 이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는다면, 선도적인 이점을 확보할 수 있다. EU는 그 규모와 ‘규제 우선’ 접근 방식 덕분에 이러한 역할을 맡을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실제로 EU의 글로벌 데이터 개인정보 보호 규정(GDPR)은 일부 한계에도 사실상 세계적인 개인정보 보호 기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미국, 일본 등에서도 이를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기술 분야에서의 정치적 갈등은 미국의 대응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EU의 AI법(AI Act)과 소셜 미디어 관련 규제가 글로벌 표준을 형성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국과 그 참여 부족의 중요성은 글로벌 무대에서 점차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역 분야에서 미국의 관세 인상은 수입과 수출을 모두 감소시켜, 세계 무역에서 미국의 비중을 더욱 축소시킬 전망이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합의, 규범, 규제는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를 가지고 있다. 초기 단계에서 국제적인 지지와 협력을 얻어 글로벌 표준을 정립하려는 시도는 결국 더 많은 국가와 참여자를 끌어들이며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약화로 인해 국제 질서의 체계성이 흔들리고, 분열이 심화되며, 더 큰 혼란이 초래될 위험이 점차 커지고 있다. 결국 미국은 여전히 국제적으로 중요한 국가로 남겠지만, 이전처럼 필수 불가결한 국가로 간주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