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부터 6일간 7회·전석 전회차 매진
3분마다 바뀌는 춤…지루할 틈 없어
신구세대 뭉쳐 사람의 역사 담은 춤
국립무용단 단원 이승연, 조흥동 ‘향연’ 총예술감독, 강대현 [국립극장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따닥 딱 착착착착 땅땅 두둥 탁”
오고무가 두 줄로 선 무대 위로 노란 한복을 입은 18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봄날의 개나리가 꽃봉오리를 벌리듯 춤사위가 이어지다 각자의 자리로 찾아들어가면, ‘하나된 소리’가 거대한 극장을 가득 채운다. 가로 90㎝의 공간 안에서 한 사람당 다섯 개의 북을 치면 오차 없이 맞아 떨어지는 소리가 1200여석을 타격한다. 요동치는 심장박동과 함께 무대는 절정으로 향하다 이내 얼굴을 바꾼다. 관객과 ‘밀당’(밀고 당기기)하듯 미련없이 장면 전환. 숨 돌릴 틈도 없이 빠르다.
“중학교 2학년 때 극장에서 ‘향연’을 처음 봤어요. 노란 옷을 입은 여성 무용수가 추는 오고무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무용단에 들어온 뒤 ‘향연’ 무대에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설렜어요.” (국립무용단 단원 이승연)
지금까지 한국무용 무대가 이토록 흥행한 적은 없었다. ‘향연’은 2015년 등장과 동시에 공연계를 발칵 뒤집은 작품이다. 초연 이후 4년 연속 무대에 오르는 동안 내내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지금까지 총 2만 5000명의 관객과 만난 명실상부 한국무용계의 신화다.
6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향연’은 한국무용판 ‘송년 공연’으로 봐도 무방하다. 발레계에 ‘호두까기 인형’이 있다면, 한국무용엔 ‘향연’이 있다. 국립무용단 작품으론 이례적으로 총 6일간 7회 공연을 진행한다. 이미 해오름극장 3층까지 전석 전회차 매진을 기록, 올 한 해 국립극장 공연 중 최고 흥행작 자리를 예약해뒀다. 개막을 앞두고 총예술감독 조흥동과 국립무용단 신입단원 강대현 이승연을 만나 ‘향연’의 이야기를 들었다.
국립무용단 ‘향연’ [국립극장 제공] |
정대업지무, 승무, 장구춤, 오고무, 신태평무…. 11개의 전통춤이 90분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안에 담긴 다채로운 춤사위에 기승전결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제 안무철학은 관객에게 볼거리를 줘야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도 볼거리가 없고 마음에 와닿지 않으면 졸립고 따분해요. 그래서 장면당 3분 이상 끌지 않는다는 것이 제 철칙이에요. 아무리 지루해봤자, 3분인 거죠.” (조흥동)
정성들여 올린 무대는 한 장면당 평균 3분. 물론 어떤 장면은 5분가량 이어지기도 한다. 무대 등장부터 악기 연주, 솔로에서 군무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구성으로 인해 생긴 변화다. 조 감독은 하지만 “3분만 참으며 춤이 바뀌니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조 감독의 이야기처럼 ‘향연’은 쇼트폼 시대에 최적화된 무대다. 궁중무용부터 종교무용, 민속무용까지 망라, 한국춤의 정수를 한번에 확인할 수 있다. 각 장르마다 속해있는 춤들이 3분에 한 번씩 등장, 모두가 ‘신스틸러’로 자리한다. 명장면 뒤에 또 명장면이 나오니 심심할 틈이 없다.
조흥동의 제자이자 국립무용단 신입단원인 강대현(31)은 초연 때부터 객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궁중무용인 정제로 봄을 연 뒤 무속을 통해 흥을 올려주며 여름을 맞다가 장구춤, 한량무, 소고춤으로 클라이맥스를 맞은 뒤 추운 겨울의 신태평무로 태평성대 기원하는 구성과 흐름을 가진 작품”이라고 했다.
‘향연’은 한국무용계의 ‘특이점’이었다. 이 무대의 등판으로 ‘전통춤’은 낡고 오래된 편견을 벗었다. 전통무용은 고루하고 촌스럽다는 선입견이다. 정구호 연출가가 매만진 세련된 무대는 미장센의 정점에 올랐고, 시시각각 전환하는 전통춤의 향연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그 중심에 섰던 사람이 총예술감독 조흥동이다. 그는 1980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한 ‘살아있는 역사’이자, 국내 최다 전통 춤사위 보유자다. 조 감독은 “모든 작품을 할 때 결과물이 80점 이상은 되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무대는 우리춤의 정수만 뽑아내야 하는 작업이라 유독 자신이 없었다”고 돌아봤다.
조흥동은 ‘한국춤의 백과사전’으로 불린다. 17명의 스승들에게 개인교습을 받으며 익힌 춤들이 이 안에 녹아들었다. 그는 ‘향연’에서 바라춤, 진쇠춤, 선비춤, 장구춤, 소고춤, 신태평무를 안무했다. 여기에 이매방의 오고무, 김영숙의 제의, 진연, 무의, 양성욱의 승무를 더했다. 각각의 춤마다 달라지는 아름다운 전통의상, 텅 비워내고 색감과 조명, 일부의 오브제로만 연출한 무대는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국립무용단 ‘향연’ 속 소고춤 [국립극장 제공] |
무대 위의 춤은 극단을 오간다. 응축한 기운으로 치켜드는 팔 동작과 내딛는 발걸음은 한없이 단정하다. 그 어떤 동작도 허투루 던지지 않는 무대엔 고상한 깊이가 담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멈추고 움직이는 모든 동작이 납득 가능해 유치함이 없다. 강대현은 “딱딱 맞아떨어지는 군무가 보여주는 전통춤은 과거의 원형을 보여주면서도 현재의 세련됨을 담고 있다”고 했다.
50여 명의 단원들이 ‘공통의 안무’를 흐트러짐 없이 수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승연은 “군무를 할 때는 개인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한 사람으로 기여하고, 나의 위치가 어디든 역할이 무엇이든 다 함께 더 낳은 발전을 한다는 마음이 담기게 된다”며 “수십 명의 무용수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의 동작을 만들어가는지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면서도 무용수들은 ‘개인의 역량’도 보여줘야 하는 임무까지 안고 있다. 남성 무용수들의 ‘소고춤’ 장면은 일대일 ‘춤 배틀’의 역동성을 살렸다. 이 안엔 전통춤의 공중돌기인 자반뒤집기, 섬세한 손동작인 선자를 비롯한 여러 테크닉을 볼 수 있다. 강대현은 “저마다 안무를 해서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귀띔이다. 배틀에선 경쟁이 치열해져 일부 부상자도 나왔다.
“각자가 잘하는 것을 마음껏 발휘하는 장면이에요. 이 장면을 연습할 땐 일부러 ‘얼씨구’ 같은 추임새를 안해요. 다들 신이 나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다치는 무용수들도 나오더라고요. 대신 내가 원하는 선까지 올라오지 않으면 다시 하라고 하죠. (웃음)” (조흥동)
3분에 한 번씩 춤사위를 전환하는 과정이 무용수들에게 쉽지만은 않다. 이승연은 “제례부터 민속무, 타악, 태평무까지 여러 신에 들어가다 보니, 각 장면마다 어떤 태도와 감정을 가져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 작업”이라며 “장구춤은 봄꽃이 만개하는 느낌이라면 일무와 바라는 정제된 몸짓 안에 응집된 에너지를 써야 한다. ‘향연’이라는 옴니버스 안에서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 몸상태를 가지고 변화를 줘야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막내 단원의 이야기를 듣던 대선배는 “정확한 이야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 감독은 “우리춤은 넘쳐도 모자라도 안되고, 너무 교만해도 지나친 교태를 부려서도 안된다”며 “이상한 몸짓을 하지 않으면서 적재적소에서 격조있고 절제된 춤을 춰야 한다”고 했다.
“전통춤의 특징은 춤은 흘러가지만 정지(停止), 즉 멈춤 속에도 춤이 있다는 점이에요. 심원에서 우러나온 감정이 호흡으로 뭉쳐 손끝, 발끝으로 이동하고 머리끝으로 옮겨가 움직이는 거죠. 그 깊은 몸짓이 전통무용의 원류예요. 춤은 마음으로 추는 것이고, 그 생각을 동작이 따라갈 뿐이죠. 그래서 춤은 곧 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조흥동)
국립무용단 이승연, 조흥동 ‘향연’ 총예술감독, 강대현 [국립극장 제공] |
무대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시대와 세대의 경계를 지웠다. ‘향연’ 안엔 오늘과 만난 ‘어제의 춤’이 있다. 지나온 시간은 미래 세대들이 다시 꽃피운다.이승연은 이 작품을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했고, 강대현은 “과거의 현재춤”이라고 정의했다.
국립무용단은 그간 꾸준히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지우고 ‘오늘의 전통춤’을 만드는 작업을 이어왔다. 한국춤에 뿌리를 두고 동시대 현대무용 안무가와 만나는 시도로 춤의 지평을 넓혀왔다. 다양한 시도 와중에 다시 기원으로 돌아간 ‘향연’을 ‘국립무용단의 정수’로 꼽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향연’ 안엔 국립무용단의 어제와 오늘이 담겼다. 45년 전 국립무용단을 이끌었던 무용수 조흥동에겐 2024년의 국립무용단을 볼 때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가장 달라진 것은 ‘월등한 신체조건’이라며 놀란다. 그는 “지금 단원들은 체격이나 인물이 워낙 뛰어나다”며 “내가 무용단에 있을땐 여성 무용수들의 키가 163cm면 큰 키였는데, 지금은 훨씬 크다”며 웃었다. 무용단의 젠지 세대인 이승연은 173㎝다.
두 새내기 단원은 “사람과 사람의 역사가 모여 지금의 국립무용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국립무용단을 일궈오고, 이곳을 거쳐간 모든 사람들의 역사가 국립무용단의 오늘이 됐다”는 것이 이승연의 생각이다. ‘향연’엔 그 역사가 담겼다. 국립무용단의 정체성을 지켜온 다양한 연령대의 단원이 총출동해 신구 세대가 조화를 이루되 일부 장면에선 세대교체도 이뤄냈다.
“6년 만에 다시 함께 해보니 국립무용단은 역시 국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작품을 통해 국립무용단 단원들을 더 돋보이게 하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지금 이 무용수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국립의 저력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조흥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