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사르나트서 만난 잘생긴 부처…부처의 첫 설법지 ‘녹야원’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53) 인도 성지순례기 세 번째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사르나트 녹야원




우리 속담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자업자득(自業自得)도 유사한 경우에 사용하는데 사회 현실을 빗대어 많이 사용한다.

불교의 핵심교리인 연기법(緣起法)의 ‘선인락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苦果)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직역하면 “좋은 원인에는 즐거운 결과를 낳고, 나쁜 원인에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부처는 “갠지스강에 돌을 던지며 ‘떠올라라 떠올라라’라고 신에게 기도한다고 떠오르겠느냐”며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떠오르는 것이지”라고 했다. 참으로 합리적이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며 갠지즈강을 접한 200만명의 도시 ‘바라나시’의 번잡함에서 7㎞ 정도 벗어나면 ‘사르나트’가 있다. 사르나트에는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라고 불리며 부처가 깨달음 이후 최초로 5명의 제자에게 설법했던 불교 4대 성지 중 한 곳인 ‘녹야원’이 있다.

부처는 깨달음을 자신에게 한정짓지 않고 중생구제를 위해 설법할 사람을 물색했다. 출가 후 부처의 수행에 영향을 미쳤던 인도 최고의 명상(瞑想) 스승들을 찾았으나 이미 세상을 등지거나 등지기 직전이었다. 이에 부처가 출가할 때 함께 길을 나섰던 석가족 다섯 비구가 ‘사르나트’ 녹야원에 있음을 알고 부다가야에서 230여 ㎞를 탁발에 의지해 찾아 나섰다.

녹야원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한 수행자는 부처에게서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고 “당신의 스승은 누구이며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부처는 “나는 스승 없이 깨달아 비교할 수 없으니, 나야말로 최상의 승리자” 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수행자는 “그럴지도 모르지요”라며 비웃으며 지나갔다.

부처가 깨달은 이후 첫 시도한 대화는 실패였다. 이후 부처는 아마도 어떻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타인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며 사르나트까지 몇날 며칠을 걸어가지 않았을까.

사르나트 지역 널따란 잔디공원에 부처가 깨달음에 이른 뒤 최초로 설법을 개시하고 제자를 만든 곳, 사슴동산이라는 녹야원이 있다. 중생을 부처로 만든 성지라고들 이야기하는 곳이다.

부처의 첫 제자들과 사성제 팔정도


녹야원


부처는 녹야원으로 가면서 진리를 중생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출가 전 궁궐생활도 함께했고 부처를 따라 출가해 6년여 동안 함께 고행했기에 가장 부담이 없고 가까웠던 다섯 비구(남자 승려)에게 먼저 실험해보고 싶어 녹야원으로 갔지 않았을까.

비록 다섯 비구는 부처가 중간에 고행을 포기한 것을 보고 타락했다 생각해 부처를 떠나갔다. 꽤 오랜만에 다시 만나지만 부처가 가까이 올 때까지 그들은 외면했지만 그래도 옛 연이 있었다. 아예 부처에게 인사도 하지 말자고 다섯 비구는 서로 약속까지 했지만 부처의 얼굴에서 풍기는 광명과 위력을 마주하게 되자, “고타마(벗이여)여, 얼굴이 훤한 것 보니 그동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라며 적당하게 예를 올려 맞이한다.

그런 그들에게 부처는 “오늘부터 나를 싯다르타라 부르지 말라. 부처라고 불러라”며 주의를 준다. 동양적 사고에선 생각하기 어려운 부처의 행동이다. 그리고 부처는 설법을 시작하며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을 받아 따르고 청정히 수행한다면 곧 해탈의 기쁨을 얻으리라”는 말까지 한다.

녹야원에 위치한 부처의 첫 안거지


부처가 다섯 비구에게 한 최초의 설법은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였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라고 해 우리 윤리와 철학 교과서에도 나오기에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사성제’란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하며 생로병사의 본질적인 괴로움은 집착 때문이며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팔정도’는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올바른 관점(正見)에서 바른 생각(正思惟)과 바른말(正語)이 나오고 이를 바탕으로 바른 생업(正業)과 바른 생활(正命)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노력하고(正精進) 불법을 잘 익히면(正念) 번뇌로 인한 어지러운 생각이 버려지고 평온에 이르게(正定) 된다.”
팔정도

다섯 비구 중에는 최초의 ‘아라한(羅漢나한, 완전히 깨달아 해탈한 사람)’이고, 부처의 첫째 제자가 된 사리불에게 부처의 진리를 전했던 자로 알려진 ‘교진여’란 제자가 있다. 설법을 깨달아 구족계를 받아 최초의 승려가 됐고, ‘깨달은 교진여’라는 ‘아야! 교진여’라는 이름이 생겼다.

녹야원을 ‘처음 법륜을 굴린 곳’이라는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라고 한다. 윤(輪)은 천개의 바큇살을 가진 바퀴로 태양을 상징한다. 법륜(法輪)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의 윤(輪)으로서 부처의 가르침에 의해 허공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회전한다고 한다.

‘부처가 법륜을 소유한 진리의 왕’이라는 점을 드러내야 하는데 형상이 없다 보니 후대에 불상의 손바닥이나 발바닥에 법륜을 조각하기도 했다. 절에는 간혹 법륜상을 만들기도 하는데 경북 청도 운문사 신·구 대웅전 사이에 있는 ‘법륜상’ 조형물이 머릿속에 스쳐간다.

녹야원과 다메크 대탑


부처의 최초 설법지인 다르마 라지카 대탑


철창에 둘려 친 농장에 사슴 몇 마리가 뛰놀고 있다. 2600여년 전 이곳이 ‘녹야원’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녹야원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사슴 왕이 무리 중 새끼를 밴 암사슴을 대신해 사슴고기를 좋아하는 인간 왕을 위해 죽었다.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감동한 사람들이 이곳을 사슴들이 자유롭게 사는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이곳이 부처의 최초 설법지임을 나타내고자 기원전 3세기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왕은 다르마 라지카 대탑(법황탑)과 아소카 석주를 설치했다. 그러나 1794년 힌두교도였던 ‘바라나시’ 왕이 이를 파괴해 자신의 집을 짓는다고 뜯어가서 지금은 직경 31m 정도의 원형기단만 남아있다.

다메크 대탑(왼쪽)과 자이나교 사원(오른쪽)


대탑을 파괴하는 과정에 탑 안에서 붓다의 사리가 들어있는 사리병과 사리함을 발견했는데 사리는 갠지스강에 버려졌다. 대탑의 흔적은 녹야원 정문 입구쪽에서 만날 수 있고 빈 사리병과 사리함은 뉴델리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진리를 보는 탑’이라는 다메크 대탑 앞 잔디밭에서 입재식을 겸해 눈을 감고 마음을 열기 위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2600여년 세월을 거슬러 제자 ‘교진여’가 진리를 깨달았을 때 ‘아야! 교진여’ 외치며 느꼈을 부처의 기쁨을 그려본다.

다메크 대탑


‘다메크 대탑’은 부처가 두 번째 설법한 장소에 세워진 탑으로 아소카왕이 세우고 굽타 왕조 때 증축했으며 지금은 ‘녹야원’의 상징이 됐다. 둥글고 넓은 컵을 이중으로 엎어 놓은 듯한 대탑 외벽에는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8개의 감실이 있고 주변에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현란한 문양들이 조각돼 있다.

태양과 길상을 뜻하는 만(卍)자가 변형된 모습으로 탑신을 장식하고 상륜부는 훼손돼 없지만, 높이가 43m에 기단직경이 28m에 이른 거대한 탑이다.

다메크 대탑 외벽에는 섬세한 문양들이 조각돼 있다.


7세기 인도를 방문했던 중국 당나라의 현장스님이 이곳 녹야원을 60m 높이의 수행시설과 가람시설이 화려하고 웅장하며 8등분으로 구분했으며 1500여명의 승려가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고 ‘대당서역기’에 기록했다.

지금도 다르마 라지카 대탑, 부처가 첫 안거를 보낸 근본여래향실, 수천 명 승려들의 숙소, 법회나 모임 공간, 봉헌탑, 우물 등 기둥과 벽들만 남은 많은 유적이지만 옛 영광을 돌이켜 보기에 충분한 웅장한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아소카 석주


15m 정도로 추정되는 아소카 석주도 부러져 2m 정도만 덩그러니 남아있는데 석주에는 세 종류의 명문이 남아 있다. 박물관 초입에 전시된 ‘4사자상’이 석주의 상단 부분이었을 것이다.

다메크 탑 돌이를 하는데 탑을 둘러싼 울타리 사이로 걸식기들이 보이고 순례객들이 움직일 때마다 그 속을 채워달라며 땡그랑 땡그랑 소리를 낸다. 담장너머 모습들이 궁금해진다.

다섯 비구들이 부처를 처음 맞이한 장소에 아소카왕이 영불탑(迎佛塔)을 건립했으나 정상부가 파괴되고 그 자리에 이슬람 건축물이 얹혀졌다. 녹야원 남쪽 600여m 지점에 있다는데 우리 일정엔 없어 가보지 못했다.

12세기 이슬람 왕조의 침공으로 ‘사르나트’는 황폐화 됐고, 18세기엔 힌두교 지방정부에 의해 부처 사리탑마저 완전히 훼손됐다. 역사적으로 대형 종교들은 자신들의 종교 확장을 위해 타종교에 대한 침탈, 핍박, 파괴 등을 해왔다.

서글픈 현실이다. 다행히 불교는 종교전쟁을 일으키거나, 타 종교를 탄압했다는 기록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

잘생긴 부처상과 사르나트 박물관


사르나트 박물관


녹야원에서 걸어 5분여 거리의 박물관에 들어서니 중앙 현관에 아소카왕 석주 4사자상이 웅장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등을 맞댄 네 사자가 밟고 있는 둥근 정판에는 말과 코끼리, 소, 법륜 등이 조각돼 있다.

녹야원 아소카 석주 상단 부분으로 가장 오래된 유물 중 하나다. 인도 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4사자상은 1950년부터 인도의 국장(國章)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르나트 박물관의 4사자상


4사자상 위에는 24개의 바큇살로 된 법륜이 있었다. 지금은 박물관 전시실 벽면에 깨진 법륜 일부가 남아있다. 아소카왕이 석주를 만들 때 정상에는 사자상 외에도 소, 코끼리, 말 등이 장식되기도 했다. 코끼리는 마야부인의 태몽, 소는 출가 전 태자로서의 생애, 말은 출가, 사자는 법왕으로서 부처를 상징한다.

초전법륜상


박물관 안쪽으로 들어가니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부처이며, 처음 설법하는 모습을 조각한 ‘초전법륜상’(初轉法輪像)이 이목을 끌고 있다. 파괴됐던 ‘다르마 라지카 대탑’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코가 약간 훼손돼 있지만 잘생긴 소년의 얼굴모습이 뚜렷해 편안하고 따뜻하며 다정해 보인다.

이 불상은 분홍색 사암으로 만들어졌으며 한참을 바라보게 할 정도로 불상 예술의 백미라 할 만큼 빼어나고 아름답다. 인증샷 찍기에 바쁘다.

불전팔상도


부처의 일생을 축약해 전달하는 불전팔상도(佛傳八相圖)는 서기 5세기경 조각 작품으로 우리가 가고자 하는 8대 불교성지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 외에도 시대에 따른 여러 부처상, 보살상, 법구들이 전시돼 있고 다른 한편에는 힌두교 여러 신들의 조각상도 전시돼 있다. 서기 1세기부터 11세기에 걸친 다양한 미술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부처는 바라나시에서 젊은 부호의 아들 ‘야사’를 교화해 여섯 번째 제자로 받아들였다. 야사의 친구 50명도 함께 제자가 됐다. 이로써 부처를 따르는 제자들은 56명으로 불어났다.

야사의 부모도 재가 신도가 됨으로 불교 최초 남신도(우바새)와 여신도(우바이)로 이름을 올렸고, 이로써 불교 교단의 단초가 마련됐다. 부처가 56명의 제자와 함께 천하를 일깨우기 위해 대장정을 떠났듯 우리 순례단 50여명도 다음 목적지인 불교 최대의 성지 ‘부다가야’로 떠난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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