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한방이 없다?…“의도한 것이라 당연”
거사 이후 해방까지 35년…끝나지 않은 이야기
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 장군을 연기한 배우 현빈을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CJ ENM 제공] |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휴머니스트’ 안중근. 좌고우면하지 않고 늙은 늑대를 처단하기 위해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지만 골방에 웅크리고 괴로워하는, 답답할 정도로 원리원칙주의자이며 적장을 살려줬다가 동지들을 죽음에 이르게하고 자책하는, 강골(强骨)의 독립투사의 전형성에서 탈피한 배우. 우민호 감독이 ‘삼고초려’ 끝에 캐스팅한 배우 현빈이라 가능했으리라.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현빈은 생각을 정리한 후에 차분하고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이 영화에 나온 안중근 장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영화 ‘하얼빈’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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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처음과 끝이 모두 현빈의 모습과 목소리다.안중근과 그의 동지 독립 투사들에 대한 영화이기에, 안중근이 곧 ‘하얼빈’이었다. 때문에 영화 흥행에 대해서도 단순한 주연배우로서의 책임감을 넘어 중압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그는 인터뷰 도중 여러번 “결과가 좋았으면 좋겠다”고 되뇌었다.
현빈은 “배우가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 크다”며 “더군다나 안중근 장군의 존재감과 상징성은 더 크다보니까 촬영하면서도 그랬고, 개봉하고 나서도 얼마간 그런 부담감 갖고 있을 것 같다”고 털어놨다.
지난 3년간 안중근이 되기 위해 매일같이 상상하고 일체(一體)가 되려 했기에 후유증 역시 남다르다고 전했다.
“다른 작품들이랑은 완전히 달랐던거 같다. 보통 촬영이 크랭크업(종료)하고 나면 메이킹 팀에서 소감 을 물어봐 영상으로 담는다. 처음으로 왈칵 쏟아졌던거 같다.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마지막 소감을 물을 때 이 정도의 (북받치는) 감정은 처음 느꼈다. 아직 안 끝난 기분, 그리고 무언가가 저를 누르고 있었는데 이제 떨칠 수 있을까, 하는 복합적 감정이 다가왔었다.”
‘하얼빈’은 그의 말처럼 “시원한 한 방”이 있는 영화가 아니다. 오락영화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각잡고 엄숙하게 봐야만 할 것 같은 위인전에 가깝다. 신아산 전투 장면을 제외하면 엄청난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안중근을 표현하는 현빈도 계속해서 내면을 쫓는 연기를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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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거사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거사를 치르러 가는 과정에서의 안중근과 독립투사들은 어땠을까를 보자는 것이 우리 영화의 의도”라면서 “이들도 사람인데,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환경에서 두렵고 무서운 감정, 그리고 본인의 지위와 위치로 인해 판단을 잘못 내려 동지들이 희생당했을 때의 미안함, 죄책감 등을 영화로 표현해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안중근 장군이 신아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포로로 잡은 일본군 모리 다쓰오(박훈 분)를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재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전혀 없다”며 살려주는 모습은 ‘꽉 막혔다’고 생각할 정도로 답답한 인상을 준다.
현빈은 “제가 자료와 기록들에서 (안중근의) 발자취를 찾아보면서 장군이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 또는 행동을 할 때 왜 이렇게 했을까를 상상을 했다. 이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인으로서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모습이 있었다”며 “본인도 체포됐을 때 군법으로 재판을 받기를 원했고, 동지들을 계속해서 믿고 기회를 주는 것 또한 군인으로서의 신념, 그리고 나라를 지키려는 단 하나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동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가장 나약한 모습이 나왔다. 거사에 쓰기 위해 매우 어렵게 구한 폭약이 공중분해돼 버리고, 일행 중 ‘밀정’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그는 골방 구석에 처박힌다.
“그날 의상 분장을 하고 골방 세트장에 들어갔을때, 그 곳의 공기나 느낌을 느끼면서 한참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창 세팅하느라 분주하던 때였다. 엄청 작은 방이었는데 침대 바로 앞에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원래 콘티는 안중근이 그 의자에 앉고 최재형(유재명 분)이 침대 앞에 있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제 눈에 모퉁이 옆 벽에 빛 한 점 안들어가는 공간이 확 들어오더라. 그냥 제가 안중근 장군이라면 바로 저기, 아무도 나를 못 찾는 공간에 숨고싶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작고 나약한 안중근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의자 말고 그 틈에 웅크리고 앉겠다고 제안했다.”
얼어붙은 두만강(몽골 홉스골 호수)위를 걸어가는 안중근 장군의 모습을 연기할 때도 극한의 외로움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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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빈은 “영화에서 거사가 행해지기 전까지 안 장군은 계속해서 실패했던 사람이다. 동지들이 옆에 있어도 사실은 혼자 서있는 것처럼 외로웠을 것”이라며 “얼어붙은 두만강 위에서의 장면은 외로움 그 자체였다. 외롭고, 무섭고, 한 치 앞도 안보이고, 저 끝에는 뭐가 있는지 모르겠는…. 그런 것들이 온전히 느껴졌던 로케이션 장소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렸던 이토 히로부미 저격신은 통념을 비껴간다. 총알이 발사되고 난 후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주변에 있던 인물들의 얼굴은 단 하나도 비추지 않고 갑자기 카메라는 위로 올라가 부감(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며 촬영하는 것) 숏을 찍는다. 대신 “까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현빈의 목소리가 꽤 긴 시간 이어진다.
“처음 외치기 시작할 때는 이 임무를 수행해 낸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였다. 그리고 점점 인간 안중근 한 사람의 목소리로 외쳤다. 데시벨을 점점 더 올려서 최대한 많은 사람, 넓은 공간에 울려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목이 나가서 갈라질 때까지 외쳤는데 그게 감독님의 의도였고, 얼굴을 화면에 잡는 것보다 소리가 더 여운이 센 것 같다.”
교수대 위로 걸어 올라가는 장면은 가장 “복잡한” 신이었다고 고백했다. 흐느낌도 없이, 오직 조금 가쁘게 이어지는 숨소리와 눈빛만이 감정을 내보이는 출구였다. 연출면에서도, 연기적으로도 최대한도로 절제한 티가 역력하다. 현빈은 “저희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앞으로도 미래의 이들이 우리처럼 한발한발 걸어가야 한다’였기 때문에 신파적인걸 오히려 더 배제하려고 의도했다”고 밝혔다.
“교수대 세트가 굉장히 높게 설치되어 있었다. 걸어올라가는데 제 귀에 오직 제 발자국 소리만 들리더라. 희생을 결심했지만 막상 죽음의 순간은 두려웠을 것이다. 머리에 천이 덮어지기 전에 제 눈을 통해 장군이 느낀 두려움이 표현됐으면 했다. 또한 ‘미안함’의 감정도 같이 지니고 연기했다. 저는 죽음으로서 이제 이 험난한 길에서 퇴장하는데, 남은 동지들은 더 힘들어진 길을 걸어나가야 할테니 말이다.”
영화 ‘하얼빈’ 스틸컷[CJ ENM 제공] |
외로움, 죄책감, 두려움, 부채감…인간의 가장 무거운 감정들로 두 시간 러닝타임을 내내 짓누른다. 가볍고 흥미 위주의 영상에 익숙해진 시청자에게는 ‘하얼빈’이 선뜻 고르기 힘든 영화일 수 있을 듯하다. 바꿔말하면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봐야만 감독과 배우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와 뜻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꼭 극장와서 봐주셨으면 한다. 극장 시스템에 최적화 시켜서 여러가지 시도한 작품이기에 나중에 휴대폰이나 태블릿으로 보실 수도 있지만, 스크린으로 봐주시면 분명 다른 걸 느끼실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 시장이 요즘 안 좋은데, 관객분들이 극장에 많이 와주시면 영화일 하는 사람들이 힘이 날 것이다. 여러 의미로 극장이 붐볐으면 좋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