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 이용 정황 수사 계획
제2의 안종범 수첩될까
‘12·3 비상계엄’ 기획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된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24일 오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부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123 비상계엄 사태의 기획자로 지목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 북한의 공격을 유도한다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 안전 확보를 위해 병력을 투입했다고 한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과 배치되는 내용이다. 이 수첩이 전모를 밝힐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이 될 수 있을까.
과거에도 이런 수첩이 정국의 변수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등에서도 주요 핵심 인물들의 자필 수첩이 유죄 입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수첩은 당시 수사가 진행되는 내내 “국정농단 전체를 입증할 사초(史草)이자 핵심증거”로 불렸다.
▶계엄 정당성 위해 ‘북풍’ 이용했나=경찰 국가수사본부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 ‘NLL(북방한계선)에서 북의 공격을 유도’라는 표현이 적시된 걸 확인했다고 지난 23일 밝혔다.
수첩은 사람 손바닥만 한 크기의 60~70 페이지 분량으로 알려졌다. 수첩엔 비상계엄 선포 직후 군 병력 배치 장소와 구체적인 병력 이동 계획이 포함됐다. 국수본은 지난 15일 노 전 사령관을 긴급체포하는 과정에서 수첩을 확보했다. 그가 무속인 활동을 한 곳으로 알려진 경기 안산의 점집을 압수수색한 결과다.
국수본은 노 전 사령관 등이 계엄의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북풍’을 이용하려고 한 정황이라고 판단했다. 해당 문구상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큰 지역인 NLL에서 군사적 충돌 상황을 유도한 것이 사실인지 등을 수사할 계획이다.
앞서 윤 대통령은 ‘국회 안전 확보’를 위해 병력을 투입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지난 12일 대국민 담화에서 “병력을 국회에 투입한 건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라며 “국회를 해산시키거나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고 했다. 법적으로 보면 목적범인 내란죄의 구성요건을 부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수첩이 증거로 인정될 경우 비상계엄의 목적을 밝힐 핵심 물증이 될 전망이다.
▶노상원 수첩, 제2의 안종범 수첩될까…앞서 국정농단 때도 이와 유사한 ‘안종범 수첩’이 스모킹건으로 떠올랐다.
안종범. [연합] |
안종범 수첩은 안 전 수석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독대 전후 박 전 대통령에게 들은 내용,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전달한 지시사항 등을 일자별로 정리한 수첩이다. 안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의 전화가 오면 일단 수첩에 ‘날림체’로 쓴 뒤 다시 깨끗한 글씨로 정돈해 정리했다.
해당 수첩은 안 전 수석의 보좌관이 청와대에서 보관하다 특검에 제출했다. 이 수첩은 2014~2016년까지 박 전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빼곡히 적어 분량만 63권에 달한다. 당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수첩을 국정농단의 ‘사초(사관이 기록한 사기의 초고)’라 부르며 주요 증거로 내세웠다.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 [연합] |
대표적인 내용이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가 실질적으로 소유한 기획사 ‘플레이그라운드’에 대한 지시다. 플레이그라운드는 박 전 대통령의 해외 순방 행사와 대기업 광고 용역을 따낸 곳이다. 안 전 수석의 수첩엔 박 대통령이 “아주 좋은 일을 하는 곳이니 투자하라”며 투자액수까지 지시한 내용이 담겼다. 그외 미르, K스포츠재단 설립과 기금액 등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부분 등이 있었다.
국정농단 사건을 판결한 법원도 수첩에 적힌 재벌총수들과 독대 내용을 바탕으로 재단 출연금 강요, SK 뇌물요구 등 혐의에 대부분 유죄를 선고했다.
박 전 대통령 1·2심,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 1·2심,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1·2심 등은 이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대법원도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부분의 증거능력을 일부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