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이로 들어와, 아파트 아파트’, 샤머니즘으로 시작해 계엄으로 끝 [2024 결산]

초유의 진실공방 민희진 vs 하이브

‘샤머니즘’으로 시작해 ‘계엄’으로 끝

 

영화 ‘서울의봄’ 한 장면

[헤럴드경제=고승희·이민경 기자]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그 어느 때보다 문제적인 해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나, 2024년은 유달리 엄혹했다. 진행형 ‘전쟁’에 불안지수를 안고 마침표를 찍는 해다.

올 연말 민주공화국을 휘젓고 있는 비상계엄 사태는 대한민국 영화계의 판도를 바꿨고, 가요계를 뒤흔든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사 하이브와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의 갈등은 K-팝 산업에 거대한 충격파를 안겼다.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는 ‘밈(meme)’의 민족을 자극해 숱한 패러디와 유행어를 남겼다.

K-팝의 뼈아픈 성장통…‘맞다이로 들어와, 아파트 아파트’

 

30년도 되지 않은 K-팝 산업은 올해도 뼈아픈 성장통을 겪었다. 갑작스럽게 몸집을 불리며 전 세계를 호령하게 된 한국 대중음악은 빛나는 ‘K’ 수사의 주인공이었으나, 눈부신 성장을 따라가지 못한 미성숙한 시스템과 불합리가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올해 가요계의 주인공은 걸그룹 뉴진스를 제작한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다. 민 전 대표와 하이브의 격돌은 K-팝 시스템에 문제의식을 던지며 대중음악 산업을 뒤흔들었다.

양측의 갈등은 지난 4월 수면 위로 올라왔다. 민 전 대표의 어도어 ‘경영권 탈취 시도’를 문제 삼으며 돌입한 하이브의 내부감사를 시작으로 뉴진스의 ‘독립’(계약해지) 선언까지 장장 8개월 넘게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진행 중이다. 해외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덩치를 키운 K-팝 기획사의 멀티 레이블(하나의 모회사(하이브) 아래 여러 레이블(빅히트뮤직, 어도어, 빌리프랩, KOZ 등) 시스템의 운영 미숙 사태가 불러온 갈등은 음반 밀어내기, 포토카드 끼워팔기와 같은 K-팝 고질병으로 확산됐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4월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컨퍼런스센터에서 어도어 경영권 탈취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하이브는 지난 22일 민 대표 등 어도어 경영진의 경영권 탈취 시도 정황을 파악하고 감사에 착수했다. 임세준 기자

요약하자면 이 사태는 민희진의 대활극이다. 2024년 4월 25일은 대한민국 대중문화 역사상 길이 남을 혁명적 상황이 연출됐다. ‘경영권 찬탈’ 주역으로 낙인찍힌 민 전 대표는 ‘슈퍼 내추럴’(뉴진스 노래 제목)한 복장으로 첫 기자회견을 열고 온갖 유행어를 쏟아냈다. 뉴진스의 데뷔 과정부터 2030 여성들이 ‘극혐’하는 중년 남성들의 만행도 폭로했다. “골프나 치고 술이나 마시는” 하이브의 임원들을 언급하면서다. “저 직장인이에요. 이 개저씨들”이라며 육두문자가 쏟아내는 순간 사안의 중대성, 사건의 진실과는 무관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는 ‘진짜’ 직장인들이 수두룩 했다. 멋드러지게 긴 칼을 휘저은 민희진의 퍼포먼스는 각종 밈과 짤로 SNS를 뒤엎었다. 그날 착용한 MLB의 파란 모자는 품절 대란이 빚어졌다. 일명 ‘말이 멈추지 않는 모자’, ‘프레젠테이션 잘하는 모자’라는 수사까지 붙었다.

민 전 대표와 하이브 사태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전 세계를 사로잡은 K-팝은 있었다. K-팝 대형그룹 2B(방탄소년단, 블랙핑크) 중 한 팀. 블랙핑크의 메인 보컬 로제다.

블랙핑크 로제

‘아파트’의 흥행엔 다층적 요인이 담겨있다. 호주에서 태어나 뉴질랜드에서 자라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뿌리깊이 가진 ‘넘버 원 걸’(로제 정규앨범 수록곡 제목) 로제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하면서도 K-팝의 새 성공방정식을 보여준 걸작이다. 특히 ‘아파트’와 이 곡이 수록된 로제의 첫 정규 앨범 ‘로지’(Rosie)는 ‘K-팝’의 ‘K’를 떼야 보편성을 얻는다는 기존 인식을 뒤엎고 그 어느 K-팝보다 한국적인 접근으로 K-디아스포라를 그렸다.

한국의 술게임을 소재로 세계적인 팝스타(브루노 마스)와 듀엣을 한 ‘아파트’는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인 ‘핫100’ 8위, 영국 오피셜 싱글 ‘톱100’ 차트 2위에까지 오르며 K-팝 여성 가수 신기록을 세웠다. 전 세계 가수 최초로 스포티파이, 유튜브, 애플뮤직 등 세계 3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1위에도 올랐다. ‘채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이라며 K-술문화 ‘아파트’를 소재로 노래 한 편을 뚝딱 만들어낸 영민한 K-팝 아티스트의 저력이 다시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아파트’ 이전 올 한 해 가요계는 ‘슈퍼’의 해였다. 나날이 ‘최고의 도파민’을 갈구하는 한국인에게 ‘슈퍼’는 명실상부 흥행 치트키였다. 2024년 최고의 걸그룹이라 할 수 있는 에스파의 ‘슈퍼 노바’를 비롯해 뉴진스의 ‘슈퍼 내추럴’, (여자)아이들의 ‘슈퍼 레이디’, 아일릿의 ‘마그네틱’ 속 ‘슈퍼 이끌림’이라는 노랫말이 빈틈없이 침투해 어디에서나 울려퍼졌다.

2024년 예언한 ‘서울의 봄’…샤머니즘으로 열고 계엄으로 닫았다

 

‘혼란한 세상’ 의지할 곳이라곤 ‘초월적 존재’ 뿐이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상투적 첨언은 힘을 잃었다.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현실과 맞닿았다. 영화속 ‘샤머니즘’과 ‘비상계엄’은 2024년 뉴스를 뒤덮었고, 영화관에서 확인했던 심박수는 TV 앞에서도 체크해야하는 상황이 됐다.

올초 ‘샤머니즘’ 광풍에 불을 지핀 영화 한 편이 등장했다. 지난 2월 22일 개봉한 ‘파묘’. 불과 3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 직전해 11월에 개봉한 ‘서울의 봄’이 달성한 기록(33일)마저 깨버렸다.

영화 ‘파묘’ [쇼박스 제공]

‘파묘’ 속 MZ무당 이화림(김고은 분)은 모든 것이 화제였다. 알록달록한 한복, 쪽진 머리의 전형적인 스타일링을 벗어던진 이화림은 힙해도 너무 힙했다. 그는 긴 생머리를 풀어헤치고, 프랑스 명품 패션 브랜드 ‘르메르’의 옷을 애용하며, 피트니스 클럽에서 스피닝으로 몸관리를 하는 트렌드세터였다. 김고은의 압도적 연기엔 소녀팬들이 숱하게 양산됐다. 아이솔레이션(몸을 제각각 분리해 움직이는 춤 동작)을 하는 듯한 대살굿 장면은 신내림 받은 이화림 자체였다. 이 장면을 코미디언 이수지가 놓칠리 없었다. ‘은교’ 때부터 김고은 패러디에 진심이었던 그의 완벽 재연으로 ‘파묘’의 화력은 SNS에서도 커져갔다.

명대사의 향연은 덤이다. 영화 곳곳엔 민족주의 코드와 짧지만 센스있는 킥(kick)이 넘쳐났다. 일본의 ‘풍수침략설’을 드러낸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는 대사가 등장할 때 1000만 관객은 항일정서로 대동단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당 이화림이다”·“왜 섬뜩한 얼굴들이 지나가냐”·“딱보니 묫바람”·“악지 중에 악지다”· “뭐가 나왔다고. 거기서. 존나 험한 게” 등은 곳곳에서 써먹힐 만한 대사였다.

화림과 봉길(이도현 분)이 얼굴을 축경문신으로 뒤덮은 모습은 한국과 중국 네티즌 사이의 언쟁으로 번졌다. 중국에 영화가 정식 개봉하기 전부터 이 장면을 두고 한 중국 네티즌이 “중국에서는 얼굴에 글을 쓰거나 새기는 행위가 매우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행위”라며 “한국인들이 얼굴에 모르는 한자를 쓴다는 게 참 우스꽝스럽다”고 비꼬면서 촉발됐다.

샤머니즘 열풍은 TV를 찾아갔다. ‘파묘’ 인기와 함께 무속인, 타로 마스터, 사주 전문가 등의 직업을 가진 청춘남녀 연애 프로그램 웨이브 ‘신들린 연애’, 티빙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샤먼:귀신전’이 무속 흥행 열차에 탑승했다. 다만 ‘샤먼:귀신전’ 제작진은 “파묘보다 우리가 먼저 제작을 시작했다”고 정정할 정도. 딱 떨어진 타이밍은 어찌됐건 호재였다.

‘서울의 봄’(최종 1300만 관객 동원)은 2023년 11월 개봉작이나, 2024년은 이 영화를 빼곤 설명할 수 없다. 지난 3일 밤 대한민국에 실제로 발령한 ‘비상계엄령’으로 인해서다. 이날 이후 콘텐츠 업계는 “‘서울의 봄’ 빼고는 다 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전두광(황정민 분) 무리의 쿠데타 시도와 이를 막으려는 이태신(정우성 분)과 일부 군인들의 분투를 긴박하게 그린 영화와 2024년 12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시간에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이 월담을 하며 본회의장에 모여 계엄령해제를 가결시키는 모습이 자연스레 겹치고, 대조됐다.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 영화 ‘서울의 봄’을 IPTV로 본 시청자는 1000% 이상 급증했으며 윤석열 대통령을 극중 전두광(황정민 분)과 합성한 패러디 포스터, 평행이론을 비롯한 각종 밈이 잇따라 올라왔다. 극장 재개봉과 텔레비전 방영 요청이 쇄도했다. 여기에 ‘서울의 봄’에서 선역인 이태신을 연기한 정우성의 사생활 스캔들이 앞서 세간을 뜨겁게 달군 터라 여러 의미로 ‘서울의 봄’은 1년 내내 화제성을 이어간 전무후무한 영화가 됐다.

놀랍게도 2024 영화계 키워드인 계엄과 무속은 현실세계에서 더욱 긴밀하게 연결됐다. 김용현 전 국방장관과 함께 계엄 사전 모의에 깊숙이 관여해 검찰에 구속 송치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실제로 경기 안산시에서 신당 운영을 도운 무속인 ‘애기 보살’로 밝혀졌다. 절묘하게 ‘파묘’와 합쳐진 2024년 버전 ‘서울의 봄’은 ‘뉴스 중독’ 사태를 불러왔다. “뉴스가 더 재밌다”며 이탈한 시청자들로 인해 12월 첫째주(2~8일) OTT 주간시청시간은 올해 최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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