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 나무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기독교 성경 요한복음 8장32절 이야기다. ‘부처의 깨달음’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기독교는 ‘예수’가 진리이고 그 안에 거할 때만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된다는 유일신의 원리가 담겨 있고, 부처는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러 ‘진리의 왕’이 되었을 뿐이다.
부처는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최초의 설법지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걸어갔지만 우리는 녹야원에서 200여km를 4시간 이상 버스로 이동해서 ‘부다가야’에 도착했다. 성지순례 일정이 어떤 날은 하루에 10시간 이상 버스를 타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도의 취약한 도로 사정과 속도 제한구역 등으로 이동거리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을 버스에서 소비해야 했다.
부처가 깨달음을 성취한 ‘부다가야’는 2억4000만 인구가 살고 있는 비아르주에 속해 있다. 최초의 사찰 ‘죽림정사’가 있는 ‘라지기르’, 마지막 안거처 ‘바이살리’, 열반지 ‘쿠시나가르’ 등 8대 성지 중 네 곳이 비아르주에 있다. 비아르주는 갠지스강이 관통하고 있는 힌두교 색채가 강한 지역으로 주법에 의해 공공장소에선 술이 금지된다.
우루벨라 마을에 있는 부처님상 |
부처의 생애와 관련해 중요 순간마다 나무가 등장한다.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날 때 어머니 마야부인이 붙잡고 있었다는 무우수(無憂樹) 나무가 나오고, 부다가야에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쿠시나가리에서 열반할 때는 사라수(娑羅樹) 나무가 등장한다. 출가 전 농사일을 지켜보며 적자생존에 대해 고뇌하며 사색에 잠겼던 곳도 염부나무(섬부나무) 밑이라고 한다.
자연의 섭리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던 고대에는 모든 지역에서 수목(樹木) 신앙이 존재했지만 인도에선 조금 더 유별났던 것 같다. 나무의 푸르고 높은 기상이 부처의 정신과도 닿아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더욱 그러해 보인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어 ‘진리의 왕’이 된 보리수나무 아래로 간다.
부처의 세번째 7일 경행처 |
부처는 모든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집착했다. 출가해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법인 고행과 명상을 통해 그 깨달음을 얻고자 먼저 고행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분을 스승 삼아 고행의 길에 접어들었으나 깨달음이라는 행복에 이르지 못했다. 다음엔 인도 최고의 높은 명상 상태에 도달한 분들을 스승 삼아 수행했으나 이 또한 한계에 부딪혔다.
명상만으론 깨달음에 이룰 수 없음을 인식하자 다시 6년 동안 고행의 길을 찾아 극단의 단식 고행을 하였다. 초인적인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자신이 수행의 방법에만 얽매여 있음을 알고 고행을 포기하고 고행림 곁에 있는 ‘나련선하’에서 목욕하고 큰 나무 밑에서 번뇌의 시간을 갖는다.
이때 최초의 공양녀라는 이름을 얻게 된 목장주 딸 수자타가 목축업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새벽에 우유죽을 끓여 거대한 나무 신에게 기원을 올리기 위해 나타난다. 그녀는 나무 밑에서 명상에 잠긴 깡마른 부처를 나무 신이 인간으로 현신한 것으로 착각했고 가져갔던 유미죽(乳米粥)을 공양하게 된다.
수자타 공양처 |
불교에서 가장 위대한, ‘의도함이 없는 최상의 공양’으로 일컬어지는 장면이지만 이 장면을 지켜본 다섯 도반들은 부처가 타락했다고 생각하며 부처를 떠나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부처는 유미죽을 먹고 발우 그릇을 강물에 띄우며 ‘자신의 깨달음이 멀지 않았다면 발우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발우를 띄우자 발우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혼자가 된 부처의 힘들고 약한 모습이었다.
유미죽으로 기력을 회복한 뒤 보리수나무 아래로 옮겨 길상초를 깔고 동쪽을 바라보며 결가부좌를 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가부좌를 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드디어 ‘집착을 벗어나서 번뇌와 망상을 끊으면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영원히 자유로워진다’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인간적인 갈등과 번뇌가 깨끗이 사라진 열반의 경지를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됐다. 깨달음은 ‘모든 것이 연기(緣起)’(불교의 연기법)라는 것이다.
네란자라강 모습. 전정각산은 강에서 멀리 나지막하게 보인다. |
수자타는 ‘착한 여인’이라는 뜻인데 네란자라 강변 수자타 집터에 탑을 세워 공덕을 기리고 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전 목욕했다는 네란자라강(한자로 ‘니련선하’)은 폭은 50여m는 될 듯 넓지만 건기여서 물은 발목 정도로 야트막했다. 강변에 서서 보니 멀리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 머물렀던 나지막한 전정각산이 보이는데 그 산속엔 고행했던 ‘유영굴’ 있을 것이다. 네란자라강에서 소떼들이 줄지어 다니는 하천민들이 거주하는 마을 길을 지나니 유미죽을 올린 자리에 수자타 사원이 있다. 유사한 형태의 공양처를 네댓 개 뒀는데 힌두교에서 관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하보디 대사원(대탑) |
마하보디 대사원은 휴대전화 소지가 금지돼 입장할 때 금속탐지기와 엑스(X)레이 검사를 철저히 한다. 다행히 손에 익숙하진 않지만 소형 카메라를 가지고 있어 영상 촬영은 할 수 있었다. 인도의 유적지 중에는 휴대전화 소지 금지, 또는 아예 촬영 자체가 금지된 곳들이 꽤 있다. 2013년 폭탄(휴대전화) 테러 사건 때문이고, 신발을 벗고 경내에 들어 가야 하는 신성한 곳들이 많아 그러한 듯하다.
마하보디 대사원은 기원전(BC) 3세기 아소카 대왕이 사원을 건립하고 석주와 승원을 세웠다. 기원후(AD) 5세기 굽타 왕조 때 증축하고 현재의 모습을 갖췄으나 9세기 힌두교 사원으로 변했다. 12세기에는 이슬람 침공으로 승려들이 모두 죽거나 피신하고 건물은 파괴되거나 홍수 등으로 흙에 묻혔다.
19세기 들어 미얀마와 스리랑카 등에서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발굴이 시작됐으나 영국 총독부는 힌두교도 지방 영주에게 이곳을 넘겨버렸다. 이런 곡절로 마하보디 대사원은 지금도 불교도와 힌두교도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불교 최대의 성지라는 곳인데 파란만장한 역사가 눈물겹다.
마하보디 대사원 1층 내부 석가모니불 |
마하보디 대사원은 중앙을 55m 정도로 높게 탑 형식으로 쌓고 네 모퉁이에 낮은 탑 모양의 건축물을 세워, 웅장하고 위용이 느껴진다. 다만 힌두교 사원의 건축양식이다.
바닥 면 한 변이 45m인 정사각형이고 위로 올라 갈수록 좁아지는 피라미드 형식이다. 금빛 상륜부는 2013년 태국 왕실과 불자들이 기증한 금 300㎏으로 공사했다고 한다. 1층에는 크지 않은 주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신 좁은 법당으로 줄 서있는 참배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준비해 간 금색광목 가사(袈裟)로 불상에 옷을 입히고 아주 잠시나마 모두가 함께 예불을 드렸다.
대사원 2층의 중앙부분과 낮은 탑 부분 두 곳에도 불상과 보살상을 모신 법당이 있다. 건물 외벽에는 빙 둘러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그 안에 불상 및 보살상들이 부조돼 있다.
보리수 나무 아래 진행 중인 법회 모습 |
대사원 좌측 벽면에서부터 출입구 반대편(뒤편) 보리수와 금강보좌 주변까지 여유 공간이 있는 곳이라면 빈틈없이 각국에서 온 스님들과 불자들이 각기의 방식으로 다양한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우리 순례단도 보리수가 보이는 한편을 자리 잡아 간단한 예불 의식을 치르고 각자 좋은 위치를 찾아 비집고 앉아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건물 우측 편엔 1m 높이 기단 위에 19개의 연꽃 모양 돌이 적당한 간격으로 놓여있다. 부처가 내디뎠던 걸음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해 만든 것이다. 연꽃 돌 위엔 참배객들이 가져다 놓은 꽃목걸이와 꽃잎들이 장식돼 있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룬 이후 세 번째 주에 경행하며 보낸 곳이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이곳 앞에서도 기도하고, 오체 투지하는 스님도 보인다. 마하보디 대사원은 대탑 건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크고 작은 다양한 탑과 불상, 구조물들이 나름의 의미를 지닌 채 산재해 있는 널따란 공원 같다.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 나무 |
보리수 나무는 마하보디 대탑 건물 뒤편에 있고 나무 아래는 황금색 금강보좌가 만들어져 있다.
보리수 아래에서 갈대와 비슷한 ‘꾸사’(길상초)라는 풀을 깔고 앉아 깨달음을 성취했는데, 기원전 3세기 아소카 대왕이 보리수 아래에 석재로 금강보좌를 만들었다. 출입이 통제된 철제 난간 사이로 어슴푸레하게나마 금빛 좌대를 바라본다.
보리수 나무 아래 금강보좌 예전 모습 [게티이미지] |
출입이 통제된 철제 난간 사이로 보이는 금강보좌 모습. |
이곳의 보리수는 깨달음의 나무라고 해 ‘대보리수’라 하는데 4대(代)에 해당한다. 부처님 당시 보리수(1대)는 아소카 대왕이 기원전 3세기 초에 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베어버렸으나, 아소카왕이 불교에 귀의한 뒤 그루터기에 향유를 뿌려 다시 싹(2대)이 나도록 했다. 이후 아소카왕의 딸이 스리랑카에 갈 때 나무줄기를 잘라 스리랑카에 심었고 이 나무(3대)는 현재까지도 살아 있어 기록이 있는 가장 오래된 나무가 됐다.
갈대와 비슷한 ‘꾸사’라는 풀로, 길상초로 불린다. |
12세기 이슬람이 인도를 점령할 때 보드가야 보리수를 뿌리까지 뽑아 멸종시켰고 19세기 복원하는 과정에 스리랑카에 있는 보리수나무 가지를 가져와 심은 것이 지금의 4대 보리수다. 줄기들이 힘차게 뻗어 몇 백 년은 됨직해 보인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뒤 일곱 번의 7일, 즉 49일간 보리수 주변에서 보내며 깨달음의 세계를 점검하며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 보리수를 응시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누렸던 정안탑이 대사원 입구 우측에 서있다. 보리수 옆에서 경행하며 보냈던 곳은 연꽃 모양의 돌이 장식돼 있고, 부처의 몸에서 오색이 발했다고 하는 연기법을 설파한 곳에는 법륜이 돌아가고 있다.
부다가야에 있는 한국 사찰 분황사 |
법구경을 설법하였다는 니그로다 나무 자리도 인근에 있다. 폭풍우가 몰려오자 뱀 신(코브라)의 왕이 부처님의 몸을 일곱 번 감고 머리를 펴서 보호했다고 하는 무짤린다 연못 정중앙에는 이를 표현한 부처상이 설치돼 있다. 전법의 길을 택한 라자야따나 숲 등 일곱 곳 모두에는 각각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부다가야에 있는 한국 사찰 분황사 |
마하보디 대사원을 나와 수자타 공양지 가는 길에 지난 2022년 부다가야에 준공한 조계종 직할 사찰 ‘분황사’를 들렀다. 비포장의 좁은 마을 길을 지나 안쪽 넓은 공간에 대웅전(큰 법당)과 많은 인원을 수용할 법한 기숙사동과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대웅전에 앉아 인상 좋은 시골 아저씨 같은 ‘본원’ 주지 스님의 귀한 법문을 듣는다.
우루벨라 마을의 불의신을 섬기는 자이나교의 제사 모습 |
자이나교의 불을 섬기던 우루벨라 가섭 3형제를 제자로 받아들였던 우루벨라 사원에는 지금도 많은 자이나교 신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불을 섬기는 제사 의식을 지내고 있었다.
‘인도’ 같은 모습이라 오히려 정겹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