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결제하는 원재료 매입비·물류비 부담↑
기업들 “수출 채산성 내년에 더 악화될 것”
해외 공장 자재비·인건비까지 도미노 상승
원·달러 환율이 지난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닫으면서 국내 수출 기업들의 원재료 비용 부담 증가로 수익성 악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부산 강서구 부산신항 모습. 부산=임세준 기자 |
[헤럴드경제=김현일·김성우 기자] 원·달러 환율이 지난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닫으면서 국내 수출 기업들의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다. 통상 환율 상승은 수출 기업에 호재로 꼽히지만 글로벌 경영환경의 급변과 공급망 재편 등으로 인해 과거의 ‘환율 공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달 3일 비상계엄 선포 직후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한 환율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이상 급등세를 이어가며 26일에는 1464.8원에 주간 거래를 마쳤다. 종가 기준 원·달러 환율이 1460원을 넘은 것은 금융위기 때인 2009년 3월 13일(1483.5원)이후 15년 9개월만이다. 27일 오전 10시에는 1480.0원을 찍었다.
금융투자업계는 1500원 돌파도 시간 문제로 보고 있다. 그동안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미국 기준금리 인하 지연 등 대외 요인이 환율 상승을 이끌었는데 여기에 국내에서 탄핵정국이라는 돌발 변수까지 덮치면서 원화가치 하락(달러 강세)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원·달러 환율이 단기간에 예상치 못한 수준으로 뛰어오르자 달러화로 주요 수출입 계약을 체결하는 기업들은 내년 사업 전략을 다시 짜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통상 달러화로 제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기업들은 달러가치가 오르면 그만큼 원화로 환산되는 이익이 늘어나 수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들이 이제 가격보다 기술 경쟁에 주력하면서 예전만큼 환율상승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태훈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환율 변동이 국내 제조업 기업의 성과에 미치는 영향’이란 보고서에서 “실질실효 환율이 10% 하락(원·달러 환율 상승)하면 대규모기업집단의 영업이익률은 0.29%포인트 하락한다”며 “삼성전자, 현대차 등 대규모기업집단의 수출 전략이 가격경쟁에서 기술경쟁으로 변하면서 원화가치 하락 시 매출 증대효과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제품의 주요 원재료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강달러는 도리어 비용부담 증가 요인으로 작용한다. 원재료 수입가격 상승에 따른 원가부담이 그만큼 커지는 셈이다.
이미 글로벌 인플레이션 기조로 올해 기업들이 지불한 원재료 구매 비용은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삼성전자의 3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퀄컴 등으로부터 사들이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솔루션 가격은 전년 연간 평균 대비 약 6% 상승했다.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AP는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 부문 전체 원재료 매입 비용 중 17.1%를 차지한다. AP 매입액은 2021년 7조6300억원에서 2022년 11조3800억원, 2023년 11조7320억원으로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도 3분기까지 누적 8억7051억원을 기록 중이다.
LG전자 역시 3분기 에어컨·냉장고의 열교환기에 들어가는 구리와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칩 가격이 각각 6.9%, 10.6% 상승하면서 원재료 비용 부담이 높아졌다. 여기에 해상으로 제품을 운반하는 데 드는 물류비까지 올해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달러로 결제하는 물류비 상승은 강달러 때 더욱 치명적이다.
‘산업의 쌀’로 통하는 철강업계도 고환율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 제품 생산에 필요한 철광석과 제철용 연료탄 등의 원재료를 달러로 수입해야 하는데 원가 부담이 지속적으로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글로벌 철강 수요 둔화와 중국산 철강의 저가 공세까지 이어지면서 수익성 지키기에 비상이 걸렸다.
주요 그룹들은 고환율 기조가 내년 상반기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이달 열린 내년 경영전략회의에서 강달러 영향 최소화 방안 논의에 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장 운영비와 인건비 등 고정비 절감에 초점이 맞춰졌다. 모 대기업은 해외 출장을 자제하고 현지법인 인력을 중심으로 대응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수출 대기 중인 차량들. [현대차 제공] |
현대자동차와 기아 등 수출 비중이 큰 국내 완성차 업계도 환율 변동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대응 전략 마련에 고심하는 모습이다. 정치 불안 등으로 인한 국가 신뢰도 하락이 현실화 할 경우 해외 사업 여건이 악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고급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하고 있는 업체들의 경우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
한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계가 바라보는 이상적인 환율조건은 지난해 초반까지 이어졌던 1200원대의 환율”이라면서 “이를 기반으로 현지 제조와 국내 수출을 비롯한 생산 플랜을 짜뒀기 때문에, 여기서 모나듯 튀어나온 환율 자체가 리스크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달러 장기화로 인한 내수시장 리스크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고환율로 내수시장 전체가 침체될 수 있고, 일부 수입차의 경우 국내에 차량을 들여오는 가격 자체가 비싸지는 결과도 발생할 수 있다.
한 수입차업체 관계자는 “대개 분기별·차종별로 중장기 계획을 맺기에 일시적 환율변동은 큰 영향이 없다”면서도 “지난해말부터 1300원대로 환율이 올라있던 상태에서 최근 1400원대까지 치솟는 현재의 상황은 향후 차량 계약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조건”이라고 우려했다.
항공업계는 환율 상승 여파로 직격을 맞은 상황이다. 특히 항공기 리스비 및 유류비가 고정 비율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환율과 유가에 민감하다.
대한항공의 경우 지난 3분기 기준 33억 달러에 달하는 순외환부채를 안고 있다. 환율 10원 변동시 약 330억원의 외화평가손익이 발생한다. 여기에 고환율이 지속될 경우 최근 살아나고 있는 여행 수요가 다시 꺾일 수 있어, 업계 전체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최근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액 1000대 기업 중 12대 수출 주력업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32.6%는 2025년 수출 채산성이 올해에 비해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해 개선될 것으로 보는 기업(20.6%)보다 많았다.
수출 채산성은 수출을 통해 기업이 벌어들이는 이익 수준을 가리킨다. 수출 채산성이 낮다는 것은 같은 양을 수출해도 수익성이 더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들은 수출 채산성 악화 요인으로 관세부담 증가(46.9%)와 함께 원자재 가격 상승(12.2%), 원화평가 절하에 따른 수입비용 증가(12.2%) 등을 지목했다.
아울러 원·달러 환율 급등은 원재료 비용 부담뿐만 아니라 해외 투자비용 상승으로도 이어져 기업들의 고심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강달러가 장기화할수록 우리나라 반도체·배터리 기업들이 미국에 짓고 있는 공장의 자재비와 인건비가 올라 투자액이 당초 계획을 초과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한, 해외 투자를 위해 빌린 외화차입금도 늘어나고 있어 환율 상승에 따른 이자비용 및 투자비 부담 증가도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