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적나라한 그림 고집했을까
그녀에게 그는 영원한 아이 같았다
사랑에 빠진 화가와 모델, 그 끝은?
에곤 실레, 빨간 스커트를 입은 발리 노이질(일부 확대), 크기 불명, 종이에 연필과 수채 등, 개인소장 |
에곤 실레, 자화상(일부 확대), 1911 |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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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초승달 집, 1915 |
“어서 문을 여세요.”
“누구시지요?” “경찰입니다.” 경찰? 발리 노이질은 습관적으로 문고리에 손을 댔다가 멈칫했다. 경찰이 여기에 왜? 설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이런 신고가 들어올 줄 알았습니다. 저희 말을 순순히 따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경찰은 은근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발리는 굳었다. 긴장감에 숨이 턱 막혔다. 당시 그녀는 고작 열여덟 살이었다.
에곤 실레, 발리 노이질, 1913 |
발리는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곧 코가 닿을 양 바짝 붙어있었다. “남자는 어디 있습니까.” “밑층에….” “아이는요?” “잠들어있을 텐데….” “알겠습니다. 이제 비켜주시지요.” 경찰은 또 한 번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한 명은 남자가 있을 작업실, 또 다른 한 명은 아이가 있을 안방으로 향했다. 발리는 그저 우두망찰하며 서있어야 했다. “아이는 찾았습니다. 외상은 없어보입니다.” “그러면…. 작업실로 내려와보게. 아주 가관이군.” 경찰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이에게 별문제가 없다는 걸 안 이들은 이제 남자에게만 집중할 모습이었다.
에곤 실레, 누워있는 누드, 1917 |
남자의 작업실을 둘러본 이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누드화가 벽 곳곳에 걸려있었다. 앳된 남녀의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그림은 이젤에도, 책상 위에도 몇 점씩 쌓여있었다. “에곤 실레 씨.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경찰이 우두커니 선 문제의 남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유괴 및 공공 부도덕 혐의를 받을 겁니다.” 발리는 연인이자 동거남, 실레가 경찰서로 사실상 끌려가는 장면 또한 맥없이 지켜봐야 했다.
에곤 실레, 녹색 스타킹을 신은 여인, 1917 |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발리는 텅 빈 집을 홀로 보살폈다. 제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애원하던 꼬마는 그날 집으로 돌아갔다.
발리는 전날 밤을 곱씹었다.
차라리 그때 대책없이 문을 열어주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뭣도 모르는 아이 부모가 실레를 유괴범으로 신고한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경찰이 이렇게나 불쑥 찾아온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경찰이 실레의 문제작을 직접 볼일 또한 없었을 테고…. 그러나 이미 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에곤 실레, Mime van Osen, 1910 |
꼬마는 그간 가정폭력에 시달린 듯했다.
자기 집에 있는 게 무섭다며 울던 아이는, 경찰에 이끌려 돌아간 직후 해선 안 될 시도를 했다는 소문도 퍼졌다. 이래선 아이가 실레의 결백을 증언해 줄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물론, 발리는 그럼에도 실레가 곧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유괴 혐의, 아울러 공공 부도덕 혐의 또한 모함에 가까운 해프닝으로 끝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실레는 순수했다. 속이 훤히 보일 만큼 새하얀 사람이었다. 그의 누드화 또한 이를 발현하는 작품일 뿐, 결코 음흉하거나 추악한 목적으로 그린 게 아니었다.
에곤 실레, Halbakt, 1911 |
그렇게 생각하던 발리 앞에 믿기 힘든 소식이 놓였다.
실레의 구금 통보였다. 경찰과 법원은 발리와 생각이 크게 다르다는 신호였다. 증거 인멸을 막기 위한 결정일만큼, 이들은 그의 유괴 혐의와 살굿빛 그림까지 대단히 심각하게 보는 게 분명했다.
발리는 상상도 못했다. 자기가 옥바라지를 할 처지에 놓일 것을.
발리는 곧장 실레를 만나러 갔다. 구치소에 있는 실레는 발리를 보자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울먹이기만 했다. 변함없이 속없는 사람이었다. 발리는 그런 그를 위해 연필을 주고, 종이를 건네고, 간단한 화구까지 챙겨줬다. 사람들은 발리를 다그쳤다. 남편도 아닌 그런 사내에게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손가락질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갇힌 와중에도 벌써 10점 넘는 그림을 그렸다며 활짝 웃는 모습을 떠올리면 매번 마음이 약해졌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도울 수만 있다면 계속 도울 생각이었다. 발리는 끝까지 확신했다. 이 사람은 결국 잘 되리라고.
에곤 실레,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구스타프 클림트, 1913 |
발리는 이로부터 1년 전인 191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실레와 처음 마주했다.
황금빛 색채를 후드득 떨어뜨리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에게 이끌려간 그곳에 실레가 있었다.
“둘이 함께 작품을 만들어보게.”
클림트는 이 말을 끝으로 물러섰다. 어느덧 공간에는 실레와 발리, 둘 뿐이었다. 빼빼 마른 스물한 살 청년과 풍성한 밤색 머리카락의 열일곱 소녀가 만난 첫 순간이었다. 청춘의 남녀는 어느덧 서로만 보고 있었다. 이들 사이 사랑의 싹이 움텄다. 화가와 모델이 아닌, 남자 대 여자로 상대를 마음에 품었다. 이날부터 두 사람은 늘 함께였다.
<에곤 실레, 발리 노이질의 자화상, 1912, 패널에 유채, 32.0x39.8cm, 레오폴드 미술관> 크고 동그란 눈을 가진 발리가 그림 밖을 쳐다본다. 그녀는 포근한 밤색 머리카락과 눈썹, 눈꺼풀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벽안의 눈빛 또한 따뜻해보이기만 한다. 그녀의 검은 옷 또한 이 그림에서는 포용과 흡수의 면만 부각하는 듯하다. 언뜻 보면 실레의 <꽈리가 함께 있는 자화상>과 비슷한 구성이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는 정반대다. 이 그림은 한때 나치에게 도둑맞은 적이 있었다. 12년에 걸친 법적 투쟁 끝에 지난 2010년 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은 레오폴드 미술관의 상징 역할을 하고 있다. |
때마침 발리에게는 실레, 실레에게는 발리가 있어야 했다.
발리는 빈에서 남쪽으로 30㎞가량 떨어진 타텐도르프에서 왔다. 발리는 태생적으로 끼가 많았다. 그런 그녀에게 대도시 빈은 기회의 땅처럼 보였다. 꿈을 펼치려면 일단 돈부터 벌어야 했다. 그녀는 모델 일과 함께 판매원, 계산대 직원 등 일자리를 전전했다. 아버지는 일용 노동자, 어머니는 작은 초등학교의 교사였다. 집안에선 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더더욱 여러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발리 노이질의 초상화(추정) |
발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지치고 있었다.
빈의 밤거리는 화려했다. 하지만 그만큼 또 매정하기도 했다. 클림트의 눈에 드는 모델이 되는 등 나름대로 성과는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여전히 불안했고, 변함없이 불안정했다. 발리에게는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을 감싸주고, 응원하고, 같이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에곤 실레, 누워있는 남성의 누드, 1910, 캔버스에 유채 등, 152.5x150cm, 레오폴드 미술관 |
실레도 그랬다.
당시 실레는 사실상 예술계의 겉돌이였다. 눈 밝은 클림트와 일부 동료를 뺀 모두가 그를 문제아로 치부했다. 충격적일 만큼 외설스러운 주제, 얼굴이 찌푸려질 만큼의 노골적인 묘사 등이 이유였다. 앞서 실레는 고작 열여섯 살 나이로 명문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실레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통 기법을 점점 더 멀리했다.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마치 반작용에 나서는 듯 적나라한 표현에 몰두했다. 결국 그곳에서 3년을 버티지 못했다. 친구 몇몇과 그만둔 후 그림에 대한 여러 실험에 나섰지만, 예술계 기득권은 이를 깎아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실레에게도 사람이 필요했다. 자기 말을 들어주고, 편이 되고,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에곤 실레, 꽈리가 함께 있는 자화상, 1912, 패널에 유채, 32.2x39.8cm, 레오폴드 미술관> 부릅뜬 실레의 눈에선 강한 확신이 묻어난다. 살짝 돌린 고개, 꾹 다문 입술, 짙은 검은색 옷에서 무엇이든 타협 따위는 없다는 듯한 마음도 읽을 수 있다. “감히 누가 나를…?” 곧장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모습이다. 다만 눈망울이 너무 크기 때문일까. 왠지 쉽게 상처받을 듯한 느낌도 든다. 얼룩덜룩한 피부, 핏빛이 연상될 만큼 빨갛게 익은 꽈리는 불안감도 잡아 이끈다. 실레는 이렇듯 표현력에 있어서는 벌써 대가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는 고작 스물두 살이었다. |
발리는 실레의 문제적 그림을 봤다. 그런 다음 다시 실레의 눈을 보고, 또 한 번 그림을 바라봤다.
실레는 눈만 끔벅였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예술관이 실망스럽다면 어서 실망하고, 이제라도 관계를 물리고 싶다면 빨리 물리라는 의미일까. 발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 또한 침묵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에곤 실레, 빨간 옷을 입고 서있는 여자, 1913 |
발리는 실레의 외설적 그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가능성을 건져올린 것만큼은 확실하다.
왜 솔직하지 못한가. 당시 실레가 예술계를 향해 품은 근본적 의문은 이것이었다. 성적 욕망과 갈등,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랑과 우정만큼이나 흔한 감정 아닌가. 사람이라면 누구든 품는 이 마음에 대한 표현은 왜 기를 쓰고 쉬쉬하는가. 실레의 뒤틀린 작품은 이러한 의문이 낳은 일종의 투쟁물이었다.
그 시절 실레는 지금의 예술계 기득권 중 상당수가 위선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근엄하고 고상한 척, 뒤로는 허구한 날 환락가를 들락거리는 이들의 뒤통수를 치고 싶었다. 텅 빈 배경에서 나체로 수음(手淫)하고 있는 자화상, 어떤 상징과 비유도 없이 그저 완전히 벌거벗은 채 서 있거나 앉아 있기만 하는 여인의 초상화…. 그래서 이런 그림으로 일종의 충격요법을 시도한 건지도 모른다. 몇백 번의 작은 충격보다, 단 몇 번의 큰 충격을 안기려는 마음으로.
<에곤 실레, 빨간 스커트를 입은 발리 노이질, 1913, 크기 불명, 종이에 연필과 수채 등, 개인소장> 발리는 실력 있는 모델이었다. 발리는 실레를 위해 여러 파격적인 포즈를 취했다. 도발적인 옷과 스타킹을 챙긴 채 앉으라면 앉고, 누우라면 눕는 식이었다. 실레는 재능도 있으면서, 그에게 헌신적이기도 한 발리 덕에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더 막힘없이 펼칠 수 있었다. |
“그러니까…. 저는 당신에게 어떤 모델이 돼줄까요?”
발리가 실레에게 물었다. 실레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 외려 주춤했다. 그날부터 발리는 실레 앞에서 과감하게 옷을 벗었다. 그의 뜻에 맞춰 솔직한, 그리고 적나라한 여러 포즈를 취했다. 실레는 그런 발리를 붓으로 그렸고, 발리는 그런 실레를 마음으로 그렸다. 사랑도 함께 더더욱 무르익는 듯했다.
에곤 실레, 고개를 숙인 자화상, 1912 |
실레는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금기를 두는 일 자체를 금기로 두기로 한 듯, 한순간도 세상 눈치를 보지 않았다.
발리와 실레는 서로를 알게 된 그해에 함께 떠났다. 그곳은 한적한 시골 동네, 체스키크룸로프였다. 실레는 쉬고 싶었다. 실레는 그 무렵 빈에서 첫 단독 전시회를 열었다. 역시나 비틀리고 꺾인 누드화의 향연이었다. 이름을 더 알릴 수야 있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재차 도마 위로 오른 데 따른 결과에 불과했다. 즉, 마냥 좋은 일이라곤 볼 수 없었다. 발리 또한 그런 실레를 곁에서 돌보고, 보살피고,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체스키크룸로프는 이들이 잠깐의 유유자적한 삶을 위해 찾은 마을이었다.
에곤 실레, 회색 드레스 차림으로 무릎 꿇은 발리, 1912 |
하지만 둘은 곧 이곳에서 쫓겨나고 만다.
동네 주민은 실레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했다. 대도시 빈의 사람들조차 그런 만큼, 전혀 무리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이들은 실레가 수시로 아이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부터 못마땅하게 봤다. 묘하게 음란한, 대놓고 천박해보이는 결과물에 대해 또 한 번 부들부들 떨었다.
에곤 실레, 두 소년의 뒷모습, 1910 |
사실 실레가 소년, 소녀를 대상으로 그런 그림을 그린 데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아이들은 원초적 욕구와 충동적 감정에 울컥하기 쉬운, 말 그대로 질풍노도를 겪고 있었다. 시기로만 따지면 인간의 욕망 내지 불안을 감춤 없이 보여주는 (실레 시선에선)일종의 황금기였다. 이런 모습을 담은 그림. 그것은 실레의 예술관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잘 드는’ 칼이 될 수 있었다. 체스키크룸로프에서 실레의 생각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발리뿐이었다. 주민은 당연히도 실레의 이런 급진적 행보에 반발했다. 이들 시선에서 그는 변태적 취미를 가진 외지인일 뿐이었다.
에곤 실레, 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발리 노이질 |
발리와 실레는 빈을 잠깐 찍은 후 이번에는 노이렝바흐로 갔다. 이곳 또한 한산한 시골 마을이었다.
실레는 또 한 번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다시 그림을 그렸다. 발리는 그런 아이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같이 떠들고, 함께 뛰어놀았다. 발리의 방, 실레의 작업실은 어느덧 아이들의 놀이터로 바뀌었다.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이런 와중에 불행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실레가 감옥에 갇힌 처지가 된 게 그것이었다.
실레가 유괴범으로 몰린 사건과 관련해 보다 구체적으로 통용되는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밤. 한 아이가 문을 두드렸다. 아이는 하룻밤만 잘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자기 집에 도저히 머물 수 없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어쩔 수 없었다. 발리와 실레는 빗장을 풀었다. 엉망이 된 행색의 아이를 방에 눕힌 뒤 곤히 재웠다. 얼마 후, 누군가가 또 문을 두드렸다. 이들이 경찰이었다. “내 자식이 유괴를 당한 것 같다”는 신고를 받고 온 것이었다.
에곤 실레, 앉아있는 누드, 1917 |
실레는 정신을 차려보니 유괴와 풍기문란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하도 울어 눈이 퉁퉁 부은 발리, 그녀와의 짧은 대화로만 바깥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상태였다. 실레는 구금 상태로 3주를 흘려보냈다. 심판의 날. 판사는 실레를 내려다봤다. 혐오감에 찬 모습이었다. 판사는 실레의 그림 한 점을 직접 촛불에 태우기도 했다. 그래도 판결은 이성적으로 내려야 했다. 판사는 실레에게 유괴 혐의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다만 풍기문란 혐의로는 유죄를 선고했다. 그래도 길게 잡아둘 수는 없다고 봤는지, 투옥 기간은 사흘로 정했다.
에곤 실레, 빨간 스커트를 입은 발리 노이질, 종이에 연필과 수채 등, 개인소장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감금 생활이었다.
실레는 돌아왔다. 밖으로, 엉엉 우는 발리의 품으로, 애증 가득한 예술계로.
실레는 뜻하지 않게 일명 ‘노이렝바흐 스캔들’로 이름을 더 알릴 수 있었다.
그만의 발칙한 예술관 또한 더 멀리 퍼질 수 있었다. 빈으로 돌아온 실레는 무언가 달라 보였다. 그날 사건 이후 그의 작품은 더 원숙해졌다. 이전에는 대놓고 시선을 끌겠다는 마음이 보였다면, 이제는 나름의 절제를 느낄 수 있었다.
에곤 실레, 자화상, 1911 |
실레는 1913년 독일 뮌헨, 1914년 프랑스 파리 등에서 단독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그림을 찾는 이가 나날이 많아졌다. 때마침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영원할 듯했던 엄숙주의는 힘을 잃고 있었다. 퇴폐와 화려함이 그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산업화와 도시화, 두 기관차가 폭주하듯 빠르게 내달린 결과였다. 실레만큼이나 파격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 클림트는 어느덧 전 세계를 무대로도 거장으로 대우받는 위치에 이르렀다. 그런 클림트가 아낀 문제적 화가, 클림트에게서 “드로잉은 나보다 낫다”는 극찬을 받은 예술가. 시대가 얼굴색을 확 바꾼 채 실레에게 주목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에곤 실레, 여인의 초상화(발리 노이질) |
성공 화가 반열에 오른 실레는 1915년의 어느 날, 노이질과 마주 앉았다.
그곳은 둘이 연인 관계를 맺은 후부터 자주 가던 카페였다. “발리. 우리는 이제….” 발리는 실레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이런 날이 곧 오리라는 것 또한 오래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실레는 말을 하다 멈췄다. 목이 바짝 마르고 있는지, 커피를 길게 마셨다. “우리는 이제?” 발리는 실레가 건넨 말을 부드럽게 되풀이했다. 실레는 발리의 눈을 피했다. 괜히 다리를 떨었다. 그런 그가 꺼낸 말은….
<에곤 실레, 가족, 1918, 캔버스에 유채, 150x160.8cm, 벨베데레> 실레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죽었다. 어머니와는 관계가 썩 좋지 못했다. 누나와도 여러 갈등을 빚었고, 여동생에게는 필요 이상의 집착을 보여 지인들의 의문을 샀다. 그래서였을까. 실레는 아내와 아기가 함께하는 가정을 꾸리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간직해왔다. 임신한 아내, 에디트가 건강하게 아이만 낳을 수 있다면 그 꿈을 곧 이룰 수 있을 것이었다. <가족>을 그릴 때는 그런 기대와 희망의 감정이 너무도 컸기 때문일까. 실레 특유의 뒤틀림이 이 그림에선 크게 발현되지 않은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
남자가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다.
그는 화폭 밖을 째려보고 있다. 팔을 무릎 위로 들어올려 덩치도 더 키우고 있다. 그는 가족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외려 가족을 감싸며, 이들 모두를 지키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여자는 그의 울타리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풀린 눈매, 무방비한 자세 등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아기, 녀석 또한 남자와 여자 곁에서 보호받는 모습이다. 여자의 허벅지에 바짝 붙은 아기는 그 자체로 안전해보인다. 실레가 1918년에 그린 말년작, <가족>이다. 실레가 곧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꿈꿔왔던 가족의 구성을 기대하며 그린 작품이었다. 그림 속 남성은 실레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림 속 여성은 그간 고락을 함께한 발리가 아니었다. 아기 또한 발리의 아기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 1915, 캔버스에 유채, 150x180cm, 벨베데레> 실레가 발리에게 결별 통보를 한 무렵에 그린 그림. 생기 잃은 남성은 실레 본인일 것이다. 그런 이를 끌어안으며, 무릎을 꿇은 채 매달리는 여성은 발리일 것이다. 남자는 그런 여인이 안쓰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깨를 토닥여준다. 하지만, 그녀에게 줄 마음은 이제 없다. 남자는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떠났다. 그것은 초점 없는 눈, 경직된 자세, 시신처럼 어두워진 피부에서 알 수 있다. |
“…우리는 이제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해.”
발리는 이를 듣고도 가만히 있었다. 예상한 말 그대로였지만, 실제로 들어보니 기분이 또 묘했다.
실레는 여전히 순수했다.
변함없이 자유로웠다. 늘 그랬듯, 실레의 가장 큰 매력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즉 어떤 점에서는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다는 점을 뜻하기도 했다. 솔직한, 앞뒤 재지 않는, 보다 거칠게 말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성향이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발리는 실레의 이런 기질이 언젠가 양날의 검처럼 그녀 가슴에 꽂힐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던 것이다.
에곤 실레, Lovers |
“발리. 난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로 했어. 하지만….”
실레는 특유의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원한다면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같이 여행을 갈 수 있을 거야. 이제 연인으로는 끝이지만, 연인 같은 친구로의 관계는 이어갈 수 있어.” 발리는 실레의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정신이 들었다. 발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첫 만남 후 지난 4년간의 세월을 곱씹었다. 후드득 떨어지려는 눈물을 삼킨 채 뒤로 돌아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둘은 더는 서로를 보지 않았다.
“…실레요? 천진함과 사악함을 함께 가진 사람이지요.” 언젠가 발리는 실레에 대해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결혼할 생각입니다. 다행히 상대는 발리가 아닐 겁니다.” 이 무렵 실레는 그의 후원자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그의 대책 없는 천진함과 사악함은 단어 곳곳에 녹아있다.
에곤 실레, 줄무늬가 있는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여자, 1912 |
실레가 결혼 상대로 점찍은 이는 교양있는 집안의 여성이었다.
이름은 에디트 하름스. 가정을 우선시하는, 차분하면서도 자기 의사가 뚜렷한 여인이었다. 지금껏 불안정한 삶을 산 실레에게 물적으로, 또 심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둘은 1915년 6월에 결혼했다. 그러면 이제 안정감까지 얻은 실레는 더더욱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
그럴 것으로 보였다. 실레는 결혼 직후 제1차 세계대전 여파로 징집됐다. 하지만 곧 독일 베를린의 유력 평론지가 실레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특집 기사를 올렸고, 이 덕에 그의 위상은 더더욱 높아졌다. 이는 실레가 군인 신분으로도 안전한 박물관에서 근무할 수 있는 근거로 쓰이기도 했다. 이제 실레의 그림 대부분은 빠르게 팔렸다. 촛불에 불태워지던 얼마 전과는 비교도 못 할 수준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에곤 실레, 두 아이를 둔 엄마, 1915 |
이런 와중에 1918년, 거장 클림트가 죽었다.
실레는 본인이 클림트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예술계 또한 이를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독주(獨走)만이 남은 실레였지만, 그때 죽음의 그림자가 뜬금없이 그를 덮쳤다. 클림트가 숨진 그해 10월. 출산을 앞둔 에디트가 먼저 시름시름 앓았다. 급격하게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거짓말처럼 사망했다. 사인은 스페인 독감이었다. 다음은 실레 차례였다. 그 또한 같은 증상으로 사흘 뒤 갑작스럽게 눈을 감았다. 사인은 같았다. 향년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토록 바란 사회적 성공과 개인의 행복 모두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에곤 실레, 죽음과 인간 |
실레에게 상처받고 물러섰던 여인, 발리는 그의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었다. 발리는 1년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발리는 실레와 헤어진 후 종군 간호사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크로아티아의 한 병원에서 파견 근무도 했다. 발리는 그곳에서 병을 얻어 세상과 등진 것으로 알려졌다. 실레가 죽기 근 10개월 전, 1917년 12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이는 고작 스물셋이었다.
실레는 발리를 영원의 여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발리가 실레를 영원의 화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같이 있을 때 어떻게든 살아갔고, 떨어진 후에는 불씨 꺼지듯 허무하게 생을 다했다. 둘의 이야기는 이로써 신화처럼 끝맺었다. 둘이 함께 가며 신화 아닌 또 다른 사건을 계속 만들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모든 게 너무도 빨리 흐트러져 버렸기에, 이에 따른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욕망을 그린 화가, 에곤 실레, 에스터 셀스던, 지넷 츠빙겐베르거, 한경arte
에곤 실레, 라인하르트 슈타이너, 마로니에북스
나, 영원한 아이, 에곤 실레, 알비
에곤 실레 : 불안과 매혹의 나르시시스트, 장루이 가유맹, 시공사
에곤 실레, 앉아있는 아이, 1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