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센터 세워 폭넓은 국제활동 ‘노벨평화상’…사회봉사 매진
1994년 방북 김일성 주석 만나 한반도 평화 중재했지만 실패
바이든 “비범한 지도자 잃어”…트럼프 “모두 감사의 빚 졌다” 각계 애도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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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미 조지아주 플레인스 자택에서 향년 100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사진은 카터 전 대통령이 1980년 8월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모습. [EPA] |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미 조지아주 고향 마을의 플레인스 자택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받던 중 별세했다. 향년 100세.
현재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제47대, 카터 전 대통령은 제39대 대통령으로 1977년 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4년간 재임했다. 재임 당시보다 퇴임 후 평화 전도사로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겨 2002년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카터재단은 이날 카터 전 대통령이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고인은 이날 오후 3시 45분께 별세했다고 애틀랜타저널컨스티튜션(AJC) 등 미 현지 매체는 전했다.
본명은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이지만, 대중을 상대로 애칭인 지미(Jimmy)를 써서 지미 카터로 불렸다.
카터 전 대통령은 노년기에 여러 건강 문제를 겪었다.
직계 가족 4명(부친, 여동생, 남동생 둘)이 췌장암으로 사망하는 등 췌장암 가족력이 있으나, 본인은 2015년 8월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이 간과 뇌로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에도 합병증을 앓았으며 2019년에는 낙상으로 뇌 수술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2월 흑색종이 재발해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가정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77년을 해로한 아내 로절린 여사는 지난해 11월 향년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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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모습. [AFP] |
카터 전 대통령은 2022년 10월 98번째 생일을 맞으면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아버지 부시(조지 H.W. 부시)가 94년 171일, 제럴드 포드가 93년 165일, 로널드 레이건이 93년 120일로 뒤를 잇는다.
1976년 대선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공화당을 접전 끝에 꺾고, 8년 만에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재선에는 실패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단임에 그친 첫 미국 대통령이 됐다.
공직 생활 이전에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땅콩 재배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둬 ‘땅콩농부’로 알려졌다.
카터는 1924년 10월 1일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대규모 땅콩 농장을 운영한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지아남서주립대에 1941년 입학했지만, 이듬해 조지아공대로 편입한 뒤 해군사관학교의 문을 두드렸고, 1943년 입학해 1946년 졸업했다.
잠수함 등에서 복무하다 1953년 부친이 숨지자 해군 대위로 전역, 고향으로 돌아와 땅콩·면화 사업에 매진했다.
사업을 하면서 흑인 차별에 반대하는 인권운동 활동가로도 활약했다.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경쟁자의 부정선거가 드러나 당선됐다. 1963∼1967년 상원의원을 연임했다. 주지사 선거에서도 한 차례 떨어진 뒤 재도전해 1970년 당선됐다.
주지사 취임사에서 인종 차별 철폐를 선언해 주목받았으며 재임 기간(1971∼75년) 다수의 흑인을 공무원과 판사로 임용하는 등 개혁 성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대권 도전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다크호스’였으나 2년여간 선거운동을 통해 낮은 인지도를 극복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카터의 돌풍에는 기성 정치에 때 묻지 않은 이미지가 도움이 됐다.
수년째 이어진 경기 침체와 베트남 전쟁 패배, 닉슨 전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치면서 정치 불신이 커진 미국인들에게 그의 참신한 이미지와 새로운 주장이 어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례로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 유세에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여러분을 오도하는 말을 한다면 나에게 표를 주지 말라. (만약 그렇다면) 나는 여러분의 대통령의 될 자격이 없다”며 ‘정직’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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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모습. 카터 전 대통령은 해군으로 복무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인 땅콩 농장을 이어받았다. ‘땅콩 농부’라는 별명도 이때 생겼다. 이후 조지아주 상원의원과 주지사를 지냈다. [EPA] |
하지만 재임 기간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국내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싸워야 했고 대외적으로 ‘인권외교’를 내세워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 부문에선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위기 등이 발목을 잡았다. 물가상승률이 1977년 연평균 6.5%에서 1980년 13.5%까지 치솟았다. 이란의 정권 교체로 석유 수급에 차질이 생겨 고유가 문제가 불거졌다. 임기 말 100만 개가 넘는 일자리 창출, 재정 적자 감소, 사회보장제도 강화 등의 실적이 있었지만 경기 침체에도 물가와 실업률이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외교 부문에선 국가 간 갈등과 분쟁 해결을 위해 평화와 인권을 강조한 도덕주의 외교 정책도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정치·군사적 수단을 토대로 실리를 따지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재임 기간 대표적 치적으로는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불리는 중동 평화 협상 중재 성공이 꼽힌다.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 협정 체결을 주선했다. 이 역사적인 협정은 이듬해 3월 양국이 적대행위를 끝낸다는 조약 체결로 이어져 수십년간 이어져 온 중동 갈등을 막고 중동 평화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후 강경파 대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 대사관 직원 등 52명을 444일간 억류한 사건은 대표적 외교 실패 사례로 거론된다. 당시 특수부대를 투입한 구출 작전이 미국인 8명만 숨진 채 실패로 끝나면서 지지율은 추락했다.
그러나 퇴임 이듬해 세운 카터 센터를 바탕으로 평화·민주주의 증진과 인권 신장, 질병 퇴치를 위한 활동에 나서며 더 많은 인기를 누려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퇴임 이후 열악한 주거 환경에 놓인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돕는 봉사단체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반도와 인연도 깊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한국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아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제시, “내정간섭을 중단하라”고 반발한 박정희 정권과 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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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미 대통령(왼쪽)은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핵무장을 둘러싸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을 세웠다. 사진은1979년 6월 카터 미 대통령의 방한 때 공식 환영 행사 모습. [연합] |
그는 2018년 3월 펴낸 회고록 ‘지미 카터’에서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핵무장 등을 둘러싸고 박 전 대통령과 충돌한 1979년 6월 방한 당시 한미정상회담을 두고 “동맹국 지도자와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한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직접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담판, 북미 협상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이후 미국인 억류 사안이 불거진 2010년 8월, 국제 원로그룹 ‘디 엘더스’ 소속 전직 국가수반 3명과 함께 2011년 4월 방북하는 등 총 3차례 방북했다.
이외에도 에티오피아, 수단, 아이티,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 국제 분쟁 지역에서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중재자로 나섰다. 이런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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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찍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가족 사진. [EPA] |
1946년 로절린 여사와 결혼, 2021년 7월 10일 결혼 75주년 기념식에서 평생 산전수전을 함께 겪어온 아내에게 “(결혼생활 내내 내게) 꼭 맞는 여성이 돼 줘서 특별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카터 전 대통령 부부 슬하에는 4명의 자녀가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2006년 미 의회방송 C-스팬과 인터뷰에서 워싱턴 DC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고향 플레인스에 있는 집 앞에 묻히고 싶다는 의향을 밝힌 바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워싱턴 DC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국장으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카터센터는 밝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장례식 추도사를 부탁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고인은 미국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 점에서 우리 모두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카터 전 대통령의 시민권 및 자연 보호, 중동 평화 노력, 파나마 운하의 파나마 반환 등의 업적을 거론하면서 “카터 전 대통령은 더 낫고 공정한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아들인 칩 카터는 성명에서 “제 부친은 저뿐만 아니라 평화, 인권, 이타적 사랑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웅이셨다”면서 “저와 저희 형제와 자매는 이런 공통의 신념을 통해 전세계와 부친을 공유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