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스킨헤드 두피문신은 “영광의 흔적”
현시대 사람들에게 ‘당신들 마음 속에 안중근이 있는가’ 묻고파
영화 ‘하얼빈’에서 행동대장 일본군 모리 다쓰오를 연기한 배우 박훈[CJ ENM 제공] |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데뷔때부터 군인 역할을 하다보니까 다양하게 하게 됐다. 반란군, 진압군, 조선군, 왜군, 일본군 등등 다 해본거 같다. ‘하얼빈’은 밀리터리 유니버스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농담삼아 이제 ‘스타’(장군)가 아니면 군인 역은 안 하겠다고 선언하고 다닌다.(웃음)”
29일까지 관객 238만5000명을 극장으로 불러모은 영화 ‘하얼빈’에서 유일한 악역인 일본군 모리 다쓰오를 연기한 배우 박훈을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개봉 삼일차만에 이미 관객 100만을 돌파한 상태였다.
영화에 주연 배우로 참여한 소감, 관객 100만명이란 숫자에 거듭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힌 그는 “하얼빈은 ‘소설’과 ‘시’ 둘중에 하나를 택하자면 시에 가까운 영화”라며 “그만큼 여백이 많은 영화이기에 간결한 숏폼 콘텐츠나 OTT 영화에 익숙해진 분들에게는 스킵할 수도 없고 2배속으로 볼 수도 없어 답답했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바꿔말하면 극장에서 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저 역시도 그동안 너무 빠른 템포에 익숙해지지 않았나 스스로 질문했다”며 “우리는 요즘 ‘빠름’에 너무 젖어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필 지난해 겨울 개봉해 최근까지도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의 비서실장이자 하나회의 핵심 인물인 ‘문일평’을 연기해 깊은 인상을 남긴데다, 이번에도 안중근 장군을 끈질기게 쫓는 일본군 모리로 연이어 출연하면서 박훈에겐 ‘악역’ 이미지가 강하게 덧씌워졌다.
박훈은 “이제 미움받을 용기는 충분히 준비된 것 같다. 단련이 많이 되어있다”며 “그 전까지는 제가 선역을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악역이 극에 깊이 개입되어있고 캐릭터가 선명한데다 긴장감이 높기 때문에 관객들이 악역일 때 더 관심있게 봐주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배역 고착화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밝혔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예전엔 했다. 하지만 배우로서 계속 제안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같은 악역이라도 변주하는 것은 저의 책임이자 몫이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저의 다른 색깔도 원하는 시기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벌써 선역 제안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그의 말마따나 문일평과 모리의 얼굴은 사뭇 다르다. 모리 다쓰오의 서늘한 스킨헤드는 단순한 삭발이 아니었다. 그는 “배우가 스스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냥 삭발했을때 거울에 비친 저는 그냥 ‘박훈’이었다”며 “그래서 두피문신을 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이미지를 제 얼굴에서 찾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머리가 길게 내려왔지만 문신의 흔적은 두피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했다. 박훈은 “영광의 흔적”이라고 짧게 코멘트했다.
[CJ ENM 제공] |
모리가 하얼빈역에서 공부인(전여빈 분)에게 칼에 찔리는 장면에서 토론토 영화제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른 에피소드는 이미 유명하다. 그는 “제가 그 정도로 악독해보였나보다. 솔직히 놀랐다”며 “통쾌함에 박수가 나왔을테니 맘에 든다”고 말했다.
연기하는 동안 외면은 물론 내면까지도 완전히 일본군에 동화되어 있었다고 고백했다. 박훈은 “저는 이미 조선을 식민지배 하고 있는 제국 일본의 군인이라 ‘승리자’의 입장이기에 안중근과 독립군을 쫓는 여정에서 여유있는 마음으로 연기했다”며 “저에게 안중근과 독립군은 사실 정식 군인도 아닌,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무기를 쥔 하등의 존재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한 것이었고, 살려준 것에 모멸감을 느낀 것이다. 풀려나고 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명목상의 예의도 차리지 않고 멀리서 폭격한 것은 그저 ‘나의 흑역사를 지워야지’ 이런 느낌인 것이다. 독립군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감정적 복수의 개념과도 다르다.”
일본군에 깊이 몰입했지만 동시에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뾰족한 메시지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제 대사중에 ‘안중근은 어디에 있나’(안중근와 도코다)가 여러번 반복된다. 이 대사를 할 때마다 속으론 ‘현대의 한국에서 살아가는 당신들 가슴속에는 과연 안중근이 있는가’를 관객들에게 묻고 싶었다. 릴리 프랭키 배우가 제 의도를 눈치 챘는지, 저에게 악수를 청할때 ‘안중근와 도코다’라고 제 대사를 똑같이 읊어주었다. 고마웠다.”
영화에서 그가 ‘백미’로 꼽는 장면은 그를 비롯해 유명한 주연배우의 신이 아니다. 박훈은 “영화 초반 신아산 전투에서 한 단역 배우가 허공에 칼을 휘두르는 장면을 놓치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그 칼은 어떤 종류의 멋부림을 위해 휘둘러지지 않았다. 전쟁의 참상과 처참함을 보여주는 그 한 컷이 진짜 전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실제로 시사회가 끝나고 그 단역배우를 찾아가 인사했다. 그 배우가 ‘우민호 감독 디렉션’이었다고 답했다. 여러모로 이 영화에 남을 호연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