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헌법적 비상계엄 한국 민주주의 수호 감명
트럼프 불안정 세계에 더 큰 혼란 초래 가능
현 국제정치에서 ‘미국≠신뢰할 만한 선택지’
RCEP 15개국 다양한 분야 긴밀 협력 이뤄야
제프리 삭스(사진)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미 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트럼프는 국제무역과 금융에 혼란을 가져올 것으로 보이며, 그 이상의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세계적 석학인 삭스 교수는 ‘을사년(乙巳年)’ 새해를 맞아 본지 특별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혼란·불안정의 파고가 고조된 세계를 헤쳐나갈 조언을 전했다.
그는 “강대국 간 긴장이 고조된 시대에 자국의 안보를 지구 반대편 국가에 의존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며 “지역 내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삭스 교수는 “한국은 전통적으로 미국을 보호자이자 안정의 기반으로 삼아 의지해왔다”고 지적하고 “미국은 안정의 수호자가 아니라 불안정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해 말 벌어진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평가해달라.
▶2024년은 한국과 세계에 큰 불안정을 가져온 한 해였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대통령이 한국 헌법과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비상조치를 단행해 나라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한국 국민은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결의로 전 세계에 깊은 감명을 줬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한 상태였다. 전쟁과 기후 재난, 고령으로 건강이 악화된 미국 대통령, 심화되는 미국·중국 갈등, 그리고 만연한 정치적 불안정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오는 20일엔 트럼프 당선인이 제4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권력을 잡은 것은 상황을 안정화하기보다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최소한 그는 국제 무역과 금융에 혼란을 가져올 것으로 보이며, 그 이상의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계적인 불안정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은 자국 지역 내에서 경제적, 지정학적 관계를 강화하라는 것이다. 강대국 간 긴장이 고조된 시대에 자신의 안보를 지구 반대편 국가에 의존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지역 내에서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의 ‘리더십 공백’과 맞물려 한미 동맹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미국을 보호자이자 안정의 기반으로 삼아 의지해 왔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현재의 국제 정치 상황에서 미국이 여전히 한국이나 다른 국가들에 신뢰할 만한 선택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 자체가 지나치게 불안정해져 더 이상 그러한 보호를 제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실제로, 미국은 안정의 수호자가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의 원천이 되고 있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며 국가 안보를 보장해준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미국의 중국에 대한 도발, 예를 들어 동아시아에 새로운 중거리 미사일 시스템을 배치하려는 계획과 대만에 대한 무기 지원 확대 등은 동아시아 평화에 훨씬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는 중국이 주변국을 이유 없이 공격할 가능성보다 훨씬 심각한 위험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한국의 안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에서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확보해야 한다. 이는 중국, 한국, 일본, 아세안(ASEAN) 국가들, 그리고 오세아니아가 지역 전쟁을 방지하는 데 있어 공동으로 필수적인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동아시아에서 지역 갈등을 실질적으로 촉발할 수 있는 주요 원인은 ‘넘버 원’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비합리적인 욕망이라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정치인들은 중국이 미국의 압박과 위협에 굴복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강력하다는 현실을 아직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대만 문제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과 같은 안보 이슈로 인해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자국 안보를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사례다. 미국은 러시아가 강력히, 그리고 충분히 이해할 만하게 반대했음에도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회원국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러시아는 미국의 군사적 확장주의에 반발하며 대응에 나섰고,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전장에서 참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패배를 향해 가고 있다.
-트럼프의 고립주의·보호무역주의가 통할 거라고 보나.
▶트럼프의 미국은 세계적인 불안정을 더욱 가중시킬 가능성이 크다. 특히, 특정 형태의 불안정이 한층 더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보호무역주의자로서 미국의 관세를 인상하고 글로벌 공급망에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그는 기후 변화 부정론자로, 미국을 국제적인 기후 행동 약속에서 발을 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여러 유엔 기구에 오랫동안 반대해 왔으며, 현재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미국을 탈퇴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미국 내부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발생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지리적으로 깊게 분열된 사회이며, 트럼프가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할 경우 미국 사회 자체가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다. 트럼프는 국제 협상에서 협박과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이러한 방식이 이전보다 효과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최근 몇 주 동안 트럼프는 캐나다, 멕시코, 파나마, 덴마크(그린란드 문제), 이란, 중국 등을 대상으로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상 국가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이들 국가는 트럼프의 압박을 받는 것이 자신들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위안’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국가가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경우 어떤 대응을 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트럼프의 정책이 불러올 부정적 영향을 줄일 방법은.
▶한국이 지역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한국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과 경제, 정치, 안보 협력을 확대함으로써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협력은 미국의 군사력 강화가 아닌, 무역, 금융, 기후 행동, 21세기 인프라와 같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공동 의제를 통해 실현돼야 한다.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속한 15개국 ‘중국, 한국, 일본, 아세안 국가들, 호주, 뉴질랜드’ 은 자유무역에 머무르지 않고, 녹색 에너지, 디지털 연결성, 해운, 연구개발, 문화 교류와 관광, 집단 안보와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더욱 긴밀한 협력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RCEP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활발한 지역 중 하나다. 이 지역이 집단 안보를 강화하고 경제적 연계를 더욱 견고히 하며 국제적 갈등을 피한다면, 기술적 역동성과 높은 투자율을 바탕으로 미래 세대에 빠른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최근 정치적 사건들로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21세기 가장 성공적인 외교적 성과를 이루어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탁월한 리더십 아래, 국제 사회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 파리기후협정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2025년,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위한 새로운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해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평화와 지속 가능한 발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다가오는 한 해 동안 예상되는 여러 충격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2025년이 평화롭고 뜻깊은 해가 되기를 바란다. 홍성원 기자
제프리 삭스 교수는 누구?
제프리 삭스 교수는 거시경제와 빈곤, 재건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20년간 하버드대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컬럼비아대 석좌교수이면서 대학의 지속가능개발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유엔 산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 대표이기도 하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WB) 등의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유력 시사잡지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두 차례 선정됐고, 뉴욕타임스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로 꼽혔다. 2023년부터 3년째 헤럴드경제가 운영하는 석학 칼럼 제공 플랫폼 ‘헤럴드인사이트컬렉션(HIC)’의 고정 필진으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