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겜2’ 이서환, 일상연기의 특별함…“늘 조단역만 해오다 이게 무슨 일인지”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시즌2 정배 역

자연스러운 일상 연기 1인자로 각인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2’의 이서환 [넷플릭스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돈을 받았으면 연기를 하라고요. (웃음)”

툭 던져놓는 한 마디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동네 마트에서, 백반집 옆자리에서, 아니면 지하철에서 한 번쯤 만나게 될 것 같은 얼굴. 과장없는 표정과 담백한 말투의 생활연기는 ‘비정한 생존게임’의 현장을 ‘있음직한 공간’으로 만든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 시즌2의 공개 이후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은 바로 이 사람을 주목했다. 시즌1 주인공인 456번 성기훈의 ‘경마장 메이트’ 정배. 그를 연기한 배우 이서환(52)이다.

‘정배가 돌아왔다’. 게임 밖 세상의 인물이었던 그가 이번엔 ‘오징어게임’ 세계관 안으로 뛰어들었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지인들이 이젠 월드스타라고 응원해주면 ’무슨 월드스타냐, 올드스타‘라고 말한다”며 웃었다.

이서환이 그려가는 정배는 평범해서 특별하다. 아마도 자기 나름의 삶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둘도 없는 절친 기훈(이정재 분)과 가끔 경마장에 가서 돈을 날렸고, 호프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렸다. 정배의 삶은 어느 순간 지쳐 있었다. 그는 “호프집은 장사가 잘 안되고 늘어나는 빚과 쌓여가는 대출금에 아내와도 갈등이 있었을 것”이라며 “(정배는) 분신 같은 친구는 사라지고 가족과도 갈등을 빚어 고립된 사람”이라고 했다. 기훈 어머니의 죽음은 자신이 빌려주지 못한 300만원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런 정배 앞에 게임의 세계가 열렸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였던 거예요. 내일도 내일모레도 지옥인 삶에서 돈을 벌 수 있다니, 기회라고 생각했던 거죠. 물론 정말로 사람을 죽일지는 몰랐겠지만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니 가게 된 거예요.”

배우 이서환 [넷플릭스 제공]

모든 인위와 작위를 걷어낸 정배의 얼굴과 말은 강력한 설득력을 줬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더미를 끌어안아, 시종 분노와 광기에 쌓인 캐릭터들 사이에서 빛난 ‘존재감’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 기훈과 만나 “너 살아 있었냐”며 뱉어본 한 마디, 남들이 모르는 오영일(이병훈 분)의 모습을 본 뒤 “아까 영일씨가…아니다”라며 “사람이 이상한 거냐. 공간이 이렇게 만드는 거겠지”라며 생각을 달리하는 장면들에선 그의 오랜 연기 내공이 녹아났다. “300만원 빌려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뒤늦게 건네보는 사과엔 깊이 간직한 후회가 묻어나왔다. 무리하지 않고 힘을 쭈욱 뺀 채 뱉어내는 대사와 다층적 감정이 한 겹 한 겹 쌓인 눈빛은 지옥의 게임판에 뛰어든 평범한 한 사람의 초상이었다.

이서환은 세간의 평가에 대해 “인정받는 느낌”이라며 웃었다. 대학에서 독어독문을 전공한 그의 배우 입성기는 남들보다 늦었다. 독일어를 전공한 뒤 미래를 고민하던 때에 독일 유학까지 다녀왔다. 장장 일 년. 그는 “막상 독일에 가니 그동안 배운 독일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 너무나 당혹스럽고 막막했다”고 돌아본다. 서른한 살이 돼서야 그는 대학로로 향했다. 대학 시절 교회에서 섰던 연극, 뮤지컬 무대 경험이 그의 가슴 속에 잠들었던 씨앗이었다.

“사람들한테 종종 전 ‘못 배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요. 전공자도 아니고, 어깨 너머로 배운 연기죠. 제가 볼 때 좋은 연기라는 것이 어떤 건가 고민하며 배워왔어요.”

2004년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앙상블로 데뷔한 그는 창작 뮤지컬 ‘빨래’로 무수한 연기 스승을 만난다. 배우 이정은, 이규형, 정문성을 배출한 작품이다. 그는 “‘빨래’를 통해 나이를 불문하고 좋은 배우를 너무 많이 만났다”며 “당시 나 스스로도 편해야 보는 사람도 좋다는 답을 찾았다. 무대 언어, 매체 언어를 지키되 텍스트가 자연스럽게 나의 말이 될 수 있도록 구축해나가는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해온 그의 연기 공부 방식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땐 독백의 긴 대사가 나오면 자막을 켜놓고 ‘그만의 말투’로 따라해보는 것이다. “이 과정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오징어게임’에서 정배 역을 맡은 배우 이서환 [넷플릭스 제공]

이서환은 늘 존재했지만, 모든 작품 안에서 매순간 눈에 띄었던 것은 아니다. ‘오징어게임’ 시즌2에서 정배가 각인되자, 시즌1 다시보기에 동참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전엔 그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예전엔 작품에 나와도 캐릭터에 묻어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잘 못했다”고 돌아본다. 그동안 배우의 길을 걸으며 “연기를 하며 먹고 살려면 배우가 먼저 보여야 한다는 조언”도 적잖이 들었다. 그럼에도 “배우에겐 ‘캐릭터 구축’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한 그는 작품마다 잘 어우러진 그림처럼 존재하는 길을 택했다. 그 연기가 ‘오징어게임’에선 누구보다 빛났다.

오랜 시간 조연으로 무대와 매체를 오갔던 그는 ‘오징어게임’을 자신의 변곡점으로 꼽는다. 그는 이전엔 “변곡점이라고 꼽을 만한 시기가 없다”며 “늘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올라갔다”고 했다. 2019~2020년엔 영화 ‘마약왕’, ‘천문’,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 이르기까지 20편이 넘는 작업을 했다.

이서환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며 “다만 경제적인 면에서 힘든 순간이 많았다”고 돌아본다. “조단역들은 작품을 많이 해야 먹고 사는데, 매체 활동을 하게 되면 최소 1~2년은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기다려야 하니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각에선 조연 출연료 3억원 설이 돌았지만, 그는 “그렇게 받았으면 좋겠다”며 웃는다.

“‘오징어게임’처럼 촬영장이 O, X로 나뉜다면 주로 O에 슈퍼스타들이 앉아있고, 보조출연자들은 반대편에 앉아있어요. 전 늘 보조출연자 쪽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이번엔 반대편으로 가야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죠. (웃음)”

이젠 인지도 급상승도 실감한다. 그는 “엊그제 몸살이 나 모자에 마스크, 안경까지 쓰고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는데 ‘오징어게임 잘 봤다’는 인사도 들었다”며 웃었다. 열세살 짜리 딸아이의 학교에선 선생님들까지 “아빠 나온 드라마 잘 봤다”는 인사를 건넨다고 한다. 늘 오디션을 보거나 ‘컨펌’을 통해 배역을 만났던 그는 ‘오징어게임’ 이후 ‘러브콜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오징어게임’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보게 됐다고 했다.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만 풍경이 달라진다고 하잖아요. ‘오징어 게임’은 제게 다른 풍경을 보여줬어요. 평소 제가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보여주는 작품이죠. 시즌3는 정말 편하게 보려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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