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3대 국보 누각 죽서루의 비경 ‘손님맞이’ 한창
빨강·파랑·보랏빛 파도 번갈아 오는 밤해변 물멍
이승휴 ‘제왕운기’ 집필한 천은사, 눈길 잡는 설경
물소리 따라 ‘활기치유의숲’은 정부 웰니스 관광지
눈 내린 ‘관동제일루’ 죽서루 풍경 |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거든/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강원 삼척은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헌화가(獻花歌)’의 문학적 배경이 되는 곳이다. 이 향가에는 절세 미녀를 향한, 소 끄는 사람으로 변신한 해신(해룡)의 일종의 ‘플러팅’이 담겨 있다. 요즘 큰 호재가 생긴 삼척이 관광객에게 보내는 구애하는 모습이 마치 헌화가의 한 장면인 듯 보인다.
지난 1일 삼척-포항 간 동해중부선(KTX급 설계) 개통식이 삼척에서 개최되며, 먼훗날 두만강까지 이어질 동해선 중 남한쪽 철길 77%(부산 부전~강릉·ITX 운행)가 연결됐다. 걷기여행 해파랑길 770㎞와 동행하는 기찻길이다. 휴전선 아래 제진역까지 연결되면 남한쪽은 100% 완성된다. 그리고 우리는 통일을 기다린다.
‘약속의 땅’으로 불리던, 1970년대 인구 전국 7위까지 올라갔던 삼척은 폐광, 리모델링 등을 거쳐 올해 ‘르네상스의 꿈’에 부풀어 있다.
삼척해수욕장의 밤을 수놓는 보랏빛 파도 |
백두대간-삼척바다 “우리가 남이가”
삼척의 경동지괴 지질은 동해바다와 백두대간을 가까이 붙여놓았다. 그래서 삼척은 산과 계곡이 가깝고, 해안 절벽과 백사장이 번갈아 나타나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준다.
바다 쪽으로는 헌화가가 나온지 한나절 지나 절세미녀를 구출하기 위한 ‘구지가(龜旨歌·창해가사)’의 ‘떼창’이 불려졌던 해가사터가 삼척 최북단에 위치한다. 이어 삼척해수욕장-새천년해안도로-정라진-맹방-덕산-궁촌-초곡해변·용굴, 촛대바위-용화·장호해수욕장-사진작가의 단골출사지인 갈남-신남-임원해변-호산항-월천해수욕장 등으로 이어진다.
내륙으로는 국내 3대 국보 누각인 죽서루-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집필한 천은사-이성계 조상이 묻힌 활기-국내 최대·최고(最古) 동굴인 환선굴·대금굴의 신기-하장 숙암리 고분군-이끼폭포·미인폭포로 유명한 도계읍-‘웰니스의 메카’ 가곡면·덕풍계곡 등으로 연결된다.
겨울바다의 운치가 여름바다를 부러워하지 않는 삼척해수욕장은 해가사터와 대명소노 솔비치 남쪽에 붙어있다. 날이 좋으면 청록, 날이 흐리면 검푸른 색을 띠는 삼척 겨울바다는 백사장 끝 그네에 앉아 ‘물멍’을 해도 좋고, 동절기임에도 체감 수온이 예상만큼 차지 않은 파도 끝에 맨발을 대어도 좋다.
밤에는 야간 조명이 백사장과 산책로는 물론, 근해까지 드리워져 빨간 파도, 파란 파도, 초록 파도, 보랏빛 파도가 번갈아 치면서 장관을 연출한다.
삼척 원덕읍 수로부인 헌화공원 |
‘S라인’ 해안선과 도로가 만나는 정라진
북쪽 삼척해수욕장에서 출발해 정라진까지 4.2㎞의 도심 외곽 새천년해안도로는 해안선 S라인과 오르내리막 길이 동해안에서 가장 리드미컬하게 이어진 곳이다. 급회전 구간에는 늘 널직한 공간을 두고 바다전망대, 조각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배우 문정희가 ‘방송 선배’ 이금희·이선희와 함께 자신의 고향마을 어촌의 낭만을 보여주겠다며 KBS 예능 ‘한번쯤 멈출 수 밖에’를 통해 소개했던 정라진과 나릿골감성마을은 삼척 일대 청정 수산물의 집산지이다.
최근 삼척관광문화재단이 이곳에 미디어아트 뮤지엄인 이사부독도기념관을 조성, 먹거리와 바다정취, 예술과 역사인문학을 겸비한 ‘핫플레이스’가 됐다.
맹방-덕산(덕봉산)은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최장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기록한 ‘버터’의 앨범 재킷 촬영지다. BTS를 추억할 만한 소품이 많아 팬클럽 아미(ARMY)의 ‘성지순례“ 여행지 중 한 곳으로 유명해졌다. 이곳에서 내륙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파6짜리 홀로 유명한 근덕 파인밸리 골프장이 있다.
궁촌(宮村)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왕자들의 능이 있고, 손기정 이후 첫 마라톤 올림픽 챔피언이었던 황영조의 고향 초곡리에는 660m 산책로에 비경만을 모아둔 ‘초곡용굴 촛대바위 해안 산책로’가 반긴다. 왕복 20~30분간 동해안 최고비경을 깔끔하게 감상하며 인생샷을 남기는 곳이다.
용화·장호해수욕장은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한국의 나폴리’라는 별칭을 얻은 ‘강소’ 해수욕장이다. 궁촌~초곡~용화 구간에는 해안 레일바이크, 용화와 장호 사이에는 해상 케이블카가 오간다.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집필한 사찰 천은사의 설경 [삼척시청 제공] |
해룡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충심
내륙 여행지로는 오십천이 휘감아돌며 병풍처럼 만들어놓은 하식애 꼭대기에 임금이 내린 어제시(御製詩)와 묵객들의 시를 걸어놓은 죽서루를 시작으로, 늙지 않는 마을 미로(未老)의 천은사, 활기치유의 숲, 준경묘·영경묘 등으로 이어진다.
죽서루는 경회루·영남루와 함께 국내 3대 국보 누각이다.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바다가 아닌 오십천 강물이 휘돌아 나가는 곳, 절벽 꼭대기에 지었다. 경치 좋은 절벽 위에 자리잡으려 자연 암반을 기초로 했고,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 1층 17개 기둥의 높이를 암반의 굴곡에 맞춰 달리했다. 그래서 2층은 평평하다.
절경에 취한 송강 정철은 가사 ‘관동별곡’을 통해, ‘죽서루 아래 오십천이 비경을 담아 동해로 흘러가니 그 물줄기를 임금이 계신 한강으로 돌려 목멱(남산)에 닿게 하고 싶다’고 노래했다. 이 구절은 올해 1월 동해선 부산·울산·경북 포항 손님은 물론, 서울·경기 손님도 많이 모시고 싶은 삼척의 마음이 됐다.
헌화와 구지가를 빚어낸 해룡(해신) 말고, ‘육룡’이라 불리는 조선 건국의 뿌리, ‘용비어천가’의 실제 족적도 삼척에 남아있다. 이성계 가문을 일으킨 5대 조부모 이양무 장군과 부인인 평창 이씨의 묘인 준경묘·영경묘다. 정부 인증 웰니스 관광지인 활기치유의 숲 근처다.
인근 쉰움산 기슭에는 삼척 태생의 고려 역사가이자 문신인 이승휴 선생이 ‘제왕운기’를 집필하던 사찰 천은사가 자연 속에 숨어있다. 때마침 눈이 내려 멋진 설경을 보여준다.
철저한 고증으로 당·송·명의 역사왜곡에 맞서며, 만주·요하·홍산·연해주 일대 우리 역사를 당당하게 밝혔다. ‘제왕운기’는 국내 3대 역사서 중 정권이나 타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고증·실증된 것을 제대로 거침없이 기록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죽기 전, 고향 삼척에서 일군 가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고 향토사학자들은 전했다.
5억여년 역사를 지닌 환선굴·대금굴
준경묘와 영경묘를 지나 신기면에 이르러 한반도 최고령 동굴군을 만난다. 5억4000만년 전에 형성된 환선굴과 대금굴이다.
환선굴의 1.6㎞ 개방 코스를 도는 동안 미녀상, 4m 동굴폭포, 도깨비방망이, 하트모양의 구멍인 사랑의 맹세, 파묵칼레의 미니어처인 ‘만(萬)마지기 논두렁’, 마리아상, 만리장성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그 옆 대금굴에서는 대형 커튼 모양의 석순과 백두산 천지의 축소판인 비룡폭포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과거 탄광촌이었던 도계읍은 한때 5만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1만명에 약간 못미친다. 30여 년간 도시재생을 거쳐 문화예술-청청생태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도계읍에는 국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이끼폭포가 신비한 분위기로 육백산 자락에 은둔해 있다. ‘유리나라, 나무나라’ 뮤지엄, 스위치백 철도 유적에 세워진 하이원 추추파크 가족테마공원, 자신의 미모에 도취된 미인의 슬픈 나르시즘 전설을 품은 미인폭포, 전두 전통시장 등 자연·인문 매력을 담은 곳도 즐비하다.
삼척은 웰니스의 고장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웰니스 관광지 인증을 받은 활기치유의숲은 피톤치드, 음이온, 경관, 소리 등을 활용해 산림치유 서비스를 제공한다. 덕풍계곡으로 유명한 가곡면의 유황온천·스파, 족욕장, 가곡국민여가캠핑장 등은 숨겨진 웰니스 클러스터 지대이다.
호랑이 등줄기 같은 동해선 개통을 선언한 도시, 삼척은 ‘관광·문화 백화점’ 같은 매력을 상다리 부러지도록 차려놓고 ‘르네상스’를 기대하고 있다.
삼척=함영훈 기자